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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기자칼럼]국일고시원 화재, 그 후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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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거요? 전혀요. 희망을 안 가지는 게 편해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날 이후 자신은 서울 종로를 떠나 은평구 다가구주택에 자리를 잡았지만, 상당수 피해자들은 다시 인근 고시원으로 옮겼을 것이라는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이었다. 그는 지난해 20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던 국일고시원 화재 사고 탈출 생존자 ㄱ씨다.

경향신문

지난해 이맘때였다. 모두가 잠들어 있던 새벽, 고시원 3층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출입구에 인접한 객실에서 불이 난 탓에 3층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이곳에 살던 이들 대부분은 40대 이상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사고 소식을 전하는 사진기사에는 불에 그을린 고시원 간판 옆으로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함께 찍혀 있던 기억이 난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나의 관심사는 고공행진하는 집값이 언제쯤 안정세를 보일지에만 쏠려 있었다. 국일고시원 화재 사고를 접했을 때도 ‘안타까운 일이 또 일어났구나’라고만 생각했다. 후속보도는 며칠 가지 않았다. 참사 원인은 스프링클러 등 안전시설은 물론 창문도 없는 내부 구조로 귀결됐다. 이후 간간이 모든 고시원에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 등 단발성 소식이 보도됐다. 그러나 그뿐. 도심에 왜 이렇게 많은 고시원이 난립하는지, 가난한 사람의 주거권에 대한 논의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은 생존과 직결되지만, 모두가 무심했다.

그렇게 국일고시원 화재 사고가 발생한 지 1년이 흘렀다. 그사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지난 8월 전북 전주의 한 여인숙에서도 새벽에 불이 나 노인 3명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폐지와 고철을 주우며 보증금 없이 한 달 방값을 미리 내는 ‘달방’에 살던 이들이었다. 고시원이나 달방이나 도시 빈민들이 간신히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는 ‘방 한 칸’이었다. 도심에 이들을 위한 ‘집’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ㄱ씨는 국일고시원에서 살기 전 을지로 3가의 한 고시원에서 15년을 살았다고 했다. 을지로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고시원이 있던 건물을 헐어버린다고 해서 옮긴 곳이 국일고시원이었다. 전기공사 일을 하는 그는 서울 시내 온 동네를 돌아다닌다. 종로는 교통편이 좋아 그가 서울 어디든 쉽게 찾아다닐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종로에서 가까운 중구에라도 가고 싶었지만 들어갈 공공임대주택이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은평구에 있는 매입임대로 터를 잡았다.

그의 소개로 국일고시원에 살다 인근 고시원으로 옮긴 ㄴ씨에게도 연락을 해봤다. ㄴ씨는 “청계천 3가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며 “아무리 고시원이라지만 멀리 떨어진 곳보다 낫다. 직장도 가깝고 이 동네에 정이 들었다”고 했다. ㄱ씨도 “사람은 나무와 같아서 살던 곳에서 멀리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창간기획 ‘공공임대주택-구멍 뚫린 복지’에서 한국사회의 공공임대주택 실태를 들여다봤다. 가장 큰 문제는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정부가 밝힌 10년 이상 임대할 수 있는 공공임대는 136만5000가구지만, 반지하와 옥탑방·고시원 등에 사는 주거취약계층은 여전히 200만가구를 넘는다. 또 공공임대주택 입주 수요가 있는 지역엔 공급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빈자리는 2평 내외 쪽방과 고시원 등 차마 집이라 부를 수 없는 공간들이 채우고 있다. 그런데도 월 임대료는 30만원 안팎으로 이들이 감당하기 벅찬 수준이다.

홈리스행동은 그간 국일고시원 화재 참사를 ‘집이 없어 생긴 죽음’이라고 규정해왔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도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집 아닌 곳에 살아야 하는 병든 사회가 만든 죽음이라는 것이다. 참사 1년, 바뀐 것은 뭘까. “희망을 안 가지는 게 편하다”고 한 ㄱ씨의 말이 곱씹어진다.

이성희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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