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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직원 실수도, 왕따 사건도… CEO 형사처벌 조항 220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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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1000여 명인 생활 가전 업체 대표 A씨는 올 초 임금 체불 혐의로 형사 입건됐다. 고용노동부의 근로 감독 과정에서 지난 2016~2018년 임직원 170여 명에게 6000여 만원의 연장근로수당과 연차휴가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직원 1인당 약 35만원 정도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새 고용을 늘리는 과정에서 실무진 실수로 계산 착오가 생겼던 것"이라며 "대표가 미지급을 지시하거나 고의로 지급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입건됐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의 한 대표이사 사장은 연말 인사 철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중소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더라도 절대 대표이사는 맡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대표이사가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자나 전과자가 될 수 있다"며 "급여를 덜 받더라도 고문이나 부사장급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회사 대표에게 책임을 묻는 법 조항이 너무 많고 과도해 회사 경영에 큰 손실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CEO 처벌받을 수 있는 법 조항 2205개

국내 기업 CEO(최고경영자)가 되면 2205개 법률 항목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경제연구원은 13일 "285개 경제 관련 법률의 형벌 규정을 전수조사한 결과, 지난 10월 말 현재 형사처벌 항목은 2657개로 1999년(1868개)보다 42% 증가했다"고 밝혔다. 특히 '징역 또는 벌금'형이 52%나 늘었다. 처벌 강도 역시 높아졌다. 징역형은 1999년 평균 2.77년에서 올해는 3년으로 8.3% 늘었다. 벌금형도 평균 3524만원에서 5230만원으로 48.4% 높아졌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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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657개 처벌 항목 중 2205개(83%) 항목은 범죄 행위자인 종업원뿐 아니라 법인과 사용주까지 처벌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행위자뿐 아니라 법인과 사용주에게 법 위반 행위를 방지할 책임을 부여하기 위한 양벌(兩罰)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정주 기업혁신팀장은 "대표이사 등이 현실적으로 파악하거나 통제하기 불가능한 경우에도 양벌 규정을 과도하게 적용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이다. 이 조항은 괴롭히는 가해자는 형사처벌하지 않고, 피해자나 괴롭힘 발생 사실을 신고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용자만 형사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의 한 인사 담당 임원은 "직원 중 누군가 피해를 주장하면 전보 등 각종 인사 조치를 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제임스 김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도 "직장 내 괴롭힘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CEO가 3년 이하 징역형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이라며 "LA 사무소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는데 뉴욕에 있는 본사 CEO가 처벌받는 격이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입 회사 실무자가 수입품 가격, 품목을 허위 신고하면 그 회사 CEO에게 2년 이하 징역형이나 벌금형을 선고하도록 한 관세법, 유통업체 직원이 납품업자에게 경쟁 업체 공급 조건 등을 물어보면 유통업체 대표도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한 대규모 유통업법 조항 등도 과도한 처벌 조항으로 꼽히고 있다. 이런 법 조항 때문에 CEO가 입건돼 조사받게 되면 업무 처리에도 큰 지장을 받게 되고, 불필요한 비용도 들게 된다는 것이다.

◇"과도한 처벌 조항, 기업가 정신 꺾어"

CEO에 대한 과도한 처벌 조항은 국내 투자 확대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세 중소 제조 기업은 환경 규제 때문에 형사처벌받게 될 일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한다. 규제는 빠르게 강화되는데, 영세 기업 처지에서는 따라가기가 벅차다는 것이다. 영세 기업이 많은 도금업계는 당장 내년부터 본격 적용되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이 걱정이다. 취급 시설 적합 판정을 받지 않고 운영할 경우 3년 이하 징역,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한 영세 도금 업체 사장은 "대기환경보전법에, 화관법에 환경 관련 법이 매년 강화되다 보니 공장 문 닫게 될 위험만 늘어난다"고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현행법은 CEO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라'는 기업가 정신이 아니라 '사고 터지지 않게 관리 잘 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유환익 한경연 혁신성장실장은 "과도한 형사처벌 규정이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고 있다"며 "처벌 규정의 종합 정비가 이뤄지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신은진 기자(momof@chosun.com);김충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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