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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우리의 소리 찾아 30년 최상일 피디 “민요 통해 공동체정신 회복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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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라디오 40초 스팟프로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대학 농활시절 ‘아라리’에 꽂혀

발품 팔며 전국 1000여곳 누벼

그렇게 모은 소리만 1만8000곡

노래 못한다 사양하는 어르신 설득

2~3만명 참여…99% 세상 떠나 안타까워

자녀들에겐 부모 기억 유산으로

당시 생활상 담은 민요 가치 높아

무형을 유형으로 기록한 공 인정받아

21일 개관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초대 관장 맡기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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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하면 “노래자랑”이 나오고 “무한~” 하면 “도전”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이라는 말 다음에는 어떤 말이 연상되나. 맞다. “이 소리는 ○○○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10대들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도 나머지 문장을 술술 완성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전국민이 아는 듯 모르는 듯 다 아는 이 유행어의 출처는 <문화방송>(MBC) 라디오의 40초 스팟프로그램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강원도 정선에서 아낙들이 모여 삼을 삼으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여정을 시작한 지 올해로 꼭 30년이 됐다. 처음엔 <한국민요대전>(1989)으로 시작했다. 1시간 동안 토속 민요를 여러 개 들려주고 관련 내용을 소개했던 것이 10분으로 줄더니 이젠 40초 스팟프로그램(표준에프엠 오후 3시50분, 5시50분, 에프엠포유 1시50분)으로 남았지만, 우리의 소리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프로그램을 맡았던 최상일 피디와 함께 30년 소리의 역사를 되짚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떠나는 여정은 말 그대로 기록의 시간이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서 소개한 토속 민요는 구전으로 전해져온 것들이다. 최상일 피디 등 제작진은 1989년부터 10년간 발품 팔아 전국 마을 1000여곳을 다녔다. 전국 이장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고 몇만통의 전화를 돌려 마을에서 전해지는 민요가 있는지를 파악했다. 최 피디는 “농번기를 제외하고 1년에 6~8개월씩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비슷한 시기 <제주 문화방송> 한승훈 피디가 인근의 토속 민요를 기록해 놓은 게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잘 못한다며 사양하는 어르신을 설득하려고 마신 술만 한강이다. 그렇게 모은 우리 소리만 1만8000곡. 고기잡이 어부의 노동요부터 아낙네의 신세 한탄 노래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어허야 용두레 물올라가누나~.”(1995년 강화 용두레질 소리) 가장 기억에 남는 민요는 강원 동강에서 채록한 한 할머니의 ‘정선 아리랑’. “고단한 인생 역정과 심경을 담아 잘 불러주셨는데 석달 만에 다시 방문했을 때 그사이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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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일 피디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구전의 힘에 놀랐다고 한다. “당신 이름도 못 쓰는 문맹 어르신이 민요를 50년 동안 잊어버리지 않고 바로 어제 불렀던 것처럼 두세 시간 끊지 않고 부르시더라.”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기록으로 남긴 건 민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1995년 2255곡을 엄선해 ‘한국민요대전’이란 타이틀로 총 103장의 음반과 해설집 9권을 출간했다. 프로그램을 통해 무형의 문화가 유형의 문화가 된 셈이다. 토속 민요 가사에는 시대상이 담겼다는 점에서 기록의 의미가 크다. 근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노래는 ‘연락선 타고 돈 벌러 간다’ 등 유독 국외로 돈 벌러 간다는 가사가 많이 나오고,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민요에는 가사에 ‘네꾸타이’ ‘하이칼라’ 등 일본어가 들어 있다. 최 피디는 “가사를 통해 민요의 연대를 측정하기도 한다. 민요만 잘 연구해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토속 민요는 노동요, 연정요 등 종류가 다양하다. 민중의 삶과 애환이 담긴 노동요는 노동 방식과 종류에 따라 노래가 다르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는 잊혀가던 우리 소리를 끄집어낸 것만이 아니다. 정에 그리운 이들에게 제작진이 찾아가는 날은 동네 잔칫날이었다. “부녀회까지 동원되어 돼지 한 마리 잡고 마을 잔치가 벌어졌었다”고 최 피디는 곱씹었다. 자녀들에게는 부모를 기억하는 유산이 됐다. 지금껏 어르신 총 2만~3만명이 참여했는데 99%가 세상을 떠났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어머니가, 아버지가 라디오에서 노래했다’는 소리를 들은 자식들이 연락을 해 부모의 목소리가 담긴 자료를 복사해 줄 수 있느냐 요청도 했다고 한다. 최 피디는 “그렇게 시디로, 메일로 건네준 게 20건 가까이 된다”며 “부모님 목소리가 담긴 것도 감사한데 노래까지 들을 수 있게 이런 자료를 남겨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울컥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자녀들이 연락을 주면 목소리를 복사해 건네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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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리를 찾아 온 30년은 그에게도 운명 같은 시간이었다. 사회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한 이력 때문에 <피디수첩> 같은 시사교양 피디의 꿈을 접고 대신 라디오국에 들어오게 됐다. 대학 시절 강원도에 농활을 가서 막걸리를 마시고 선잠을 자던 그를 깨웠던 할머니의 ‘아라리’ 노래를 들은 기억을 잊지 못했던 그는 입사 6년차에 우리 민요를 찾는 기획안을 냈다. 민요 자료를 전산화하고 민요분류법을 만드는 등 그의 노력은 우리 민요의 기록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21일 개관하는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초대 관장으로 임명됐다. <문화방송>은 최상일 전 피디가 수집한 민요 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했다. 하지만 그가 2년 전 정년퇴임하면서 방송국에서는 민요의 가치를 드높이는 노력은 사실상 대가 끊겼다. “나를 이은 후배가 없는 게 아쉽지만 나라도 소리를 지켜나가겠다”는 그는 “민요를 통해 지금은 해체되다시피 한 전통공동체 사회의 문화를 음미할 수 있다. 잃어버린 공동체 정신을 민요를 통해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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