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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일사일언] 금령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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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임경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려 한다. 이 함정에 빠졌던 일이 있다. 지난 2007년부터 충청남도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난파선이 연달아 발굴되었고, 선박마다 나무에 글을 적은 목간(木簡)이 나왔다. 오랜 시간 갯벌에 묻혀 있어 글씨는 지워지거나 흐려졌고, 심한 악필인 경우도 있어 판독이 쉽지 않았다.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글자라도 더 판독하고자 노력했다.

네 번째 난파선인 마도 3호선 발굴이 한창이던 2011년 9월 어느 날, 현장에서 새로 발굴한 목간 자료를 보내왔다. 목간에 적힌 '金令公主' 네 글자를 보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공주'가 적혀 있는 목간은 처음이었다. 관련 사료를 찾으며 노력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금령공주'의 정체는 밝힐 수 없었다.

능력 부족을 탓하며 남편에게 푸념을 늘어놨다. 이야기를 듣던 남편이 물었다. "공주가 맞아요?" "네? 이 글자는 공주라고 읽을 수밖에 없는 글자잖아요?" "그동안 당신이 판독한 목간을 보면 대체로 성(姓)과 관직명을 쓰는 것 같은데, 金(김)은 성 아닌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바뀌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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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令公(영공)'은 왕족 또는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을 일컫는 용어다. '主(주)'는 높임의 의미로 쓰인다. 고려시대 전공자라면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공주'로 보고 싶은 마음에 이미 알던 사실도 망각하고, 게다가 판독의 기본인 끊어 읽기마저 고민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런 해프닝을 거쳤지만 마도 3호선의 역사적 성격을 밝히는 데는 역시 '김영공(金令公)' 목간이 결정적이었다. 김영공은 당대 최고 권력자 김준(생년 미상~1268년 사망)이며, 마도 3호선은 1265~1268년 사이 전라도 일대에서 거둬들인 곡물과 전복, 홍합 등을 싣고 당시 수도였던 강화도로 가던 중 난파한 배였다.

10여년 전 일이 떠오른 건, 오늘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이 개관한다는 소식 때문이다. 고려시대 난파선과 그 안의 유물을 총망라해 전시한다고 하니, 멋진 서해 바다 풍경도 누릴 겸 방문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




[임경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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