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협상 전제 조건으로 제시
대북 적대정책 폐기도 내걸어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장은 이날 담화에서 최근 한·미 군사 당국이 연합공중훈련을 연기한 데 대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남조선과의 합동군사연습에서 빠지든가 아니면 연습 자체를 완전히 중지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비핵화 대화 모멘텀을 살리기 위한 일회성 한·미 훈련 중지나 연기가 아니라 '영구적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에 요구해왔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모방해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는(complete and irrevocable)' 대조선(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라"고도 했다. '하노이 노딜' 이후 철저히 '남조선 패싱' 기조를 이어온 북한이 한·미 동맹 해체까지 염두에 두고 미국을 압박하는 모습이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적대시 정책 폐기는 곧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한·미 동맹 폐기'로 연결될 수 있다"며 "북한의 요구 조건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김영철은 이날 담화에서 "이제는 미국 대통령이 1년도 퍽 넘게 자부하며 말끝마다 자랑해온 치적들에 대해 조목조목 해당한 값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 치적'으로 내세워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유예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 전날 김계관 외무성 고문 담화에 이어 연이틀 내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며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미·북 협상이 재개될 기미가 보이자 '레드라인'을 넘을 수 있다고 위협하며 각종 청구서를 던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영철은 이날 담화에서 "합동군사연습이 연기된다고 하여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며 한·미 훈련의 '영구적 중단'을 분명히 요구했다. 앞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해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와 "김 위원장이 예년 수준으로 한·미 훈련을 진행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 실장의 설명과는 달리 북한은 한·미 훈련 폐기까지 요구하는 상황이다.
김영철은 또 "미국이 대화 상대방인 우리를 모독하고 압살하기 위한 반공화국 인권 소동과 제재 압박에 악을 쓰며 달라붙고 있다"며 "(미국은) 연말연시를 앞둔 지금의 바쁜 고비를 넘기기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교활하게 책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미국이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에 요구해왔던 'CVID' 표현을 빌려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는 대조선 적대시 정책 철회를 하라"고 했다. 북한이 말한 대조선 적대시 정책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 제재와 한·미 훈련, 인권 문제 제기, 테러지원국 지정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북 제재를 풀고 인권 문제도 제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북 비핵화 실무협상의 북측 수석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도 이날 조선중앙통신 인터뷰에서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조·미 대화는 언제 가도 열리기 힘들다"고 했다. 스웨덴이 중재 역할을 하는 데 대해선 "푼수 없는 행동"이라며 "미국은 더 이상 3국을 내세우며 조·미 대화에 관심이 있는 듯이 냄새를 피우지 말라"고 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면 나아가 북·미 동맹을 맺자고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압박 차원에서 강경 모드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지난 6일 권정근 외무성 순회대사의 담화를 시작으로 이달 들어서만 8차례의 담화·문답을 통해 미국을 압박해 왔다. 이를 통해 한·미 연합공군훈련 연기와 트럼프 대통령의 '미·북 정상회담 시사' 발언 등을 끌어냈다. 방미 중인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18일(현지 시각)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면담한 이후 "미국도 협상의 성공을 위해서 여러 가지 검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 내기 위해 추가적인 대북 유화책을 꺼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안보를 위협하고 대북 제재망을 흔드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상 미·북 회담이 대선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면 북 요구에 일부 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미 정가에선 한·미 훈련 연기가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로버트 갈루치 전 북핵특사는 "한·미의 군사훈련 연기 조치로 북한이 협상에서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며 "북한이 지나치게 자만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된다"고 말했다. 리처드 롤리스 전 미 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은 "북한의 요구에 (한·미가) 절망적이고 직접적인 양보를 내준 것"이라고 했다.
미·북 협상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대북 적대시 정책의 전면 폐기는 협상이 가능한 수준의 아이디어가 아니다"며 "협상 판을 깨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극적 양보를 할 가능성이 '제로(0)'에 가깝기 때문에 양측의 강대강 국면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조의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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