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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민중미술가 김정헌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사는 게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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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미대 들어가 필연적으로 민족미술 운동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90여점 선보이는 회고전
한국일보

원로 민중미술가 김정헌 4·16재단 이사장이 그림으로 대중에게 건넨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작품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 아직도 서 있는…’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 이사장을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19일 만났다. 박형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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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인들은 어째서 바다로 들어가고 있는가.’ 사진 한 장이 민중미술가 김정헌(4ㆍ16재단 이사장ㆍ73) 작가를 잡아끌었다. 2017년 가을 미국 예일대 미술관에서였다. 검은 차도르를 한 여성 무리가 검푸른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마음에 남은 거다. 전시의 주제는 ‘망명한 예술가들-상실과 희망의 표현(Artists in Exile-Expressions of Loss and Hope)’이었으니, 뭔가 위험이 닥쳐 피하는 행렬을 나타낸 거였는지도 모른다.

◇심장을 뛰게 한 미술의 힘
한국일보

김정헌 작가의 회고전 성격의 개인전 ‘어쩌다보니, 어쩔수없이’에선 초기작부터 올해 내놓은 신작까지 90여점을 만나볼 수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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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앞에서 그는 인생을 떠올렸다. “어쩌다 보니 바다로 들어가게 됐을 수도 있겠구나, 또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다 보니’는 우연의 부사절이고, ‘어쩔 수 없이’는 필연의 부사절이다. “우리 인생은 결국 우연과 필연이 늘 교차하며 이어지는 것”이란 깨달음이었다. 그 뒤로 그는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를 일상의 주문처럼 품고 산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없고, 굳이 모든 일을 이해하려 할 필요도 없다. 15일부터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도 그래서 ‘어쩌다보니, 어쩔수없이’라고 이름 붙였다.

김 작가가 붓을 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형들처럼 서울대 공대를 목표로 공부했다가 재수를 하게 됐고 입시학원이 답답해 동네 미술학원에 놀러 다녔던 게 시작이다. 그를 눈여겨본 강사가 “네 선은 천재적이다” “네 수채화의 빛깔이 샤갈의 색보다 좋다”며 미대 진학을 부추긴 거다. 학과목 실력이 좋았으니 공대 대신 미대에 2등으로 입학했다. 그래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린 친구들한테 내가 상대가 되겠어요? 하하.” 65학번이니, 하수상한 시절도 한몫했다. 조기 방학, 강제 휴교가 이어져 제대로 학교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그를 새로이 눈 뜨게 한 이가 은사인 고 임영방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다. 당시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임 전 관장이 글로 발표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이란 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미술에 사회적 역할이란 게 있다고? 미술에 무슨 힘이 있다는 거지.’ 가슴에 남은 그 문장의 답은 1979년 창단부터 함께한 민중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 활동으로 찾게 됐다. “현실을 발언한다는 뜻이에요. 발언은 저항이죠. 다시 한번 가슴이 아주 두근두근했지요. 미술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한번 시작해 보자 싶었죠.” 정권의 예술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5년 만든 민족미술협의회 참여,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초대 공동대표(1999),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취임(2007), 정권 교체로 사퇴 압력에 시달리다 위원장에서 경질되는 사태(2009)까지 그의 행보는 화폭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러니 시민사회단체의 여러 후배들이 4ㆍ16재단의 이사장으로 그의 이름을 떠올리고 추천했을 테다. 그는 “실무는 저희가 다 할 테니 맡아 달라고 부탁해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것”이라며 또 한 번 웃었다. 4ㆍ16재단은 세월호특별법에 따라 참사 이후의 과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의 왼쪽 옷깃에 세월호 어머니들이 뜨개질로 만들었다는 노란 나비 배지가 상징처럼 달려있었다.

◇신작에선 산업화가 남긴 신음에 주목
한국일보

김정헌 작가가 서울 당인리 발전소(서울화력발전소)를 모티브로 그린 ‘봄의 소리’ 작품을 보며 설명을 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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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힘을 믿기에 그는 그림으로 대중에게 늘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 선보인 신작들에서는 산업화로 버려진 것들에 주목했다. 지금은 전력 생산을 멈춘 서울 합정동의 당인리 발전소(서울화력발전소)가 모티브가 됐다. 조춘만 사진작가가 독일 남부 자를란트 푈클링엔 제철소(1873~1986)를 찍고 이를 이영준 계원대 교수가 해설한 사진집 ‘푈클링엔-산업의 자연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김 작가는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만, 다 소비되면 폐기되기 마련이고, 환경 훼손이나 기후 변화 같은 문제도 일으킨다”며 “그러니 인간이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발전소의 버려진 기계 사이로 자라고 있는 풀과 꽃들에서 끌어올린 생각은 작품 ‘산업화의 말로에 나는 소리’ ‘산업화의 꿈’ ‘봄의 소리’ 등으로 구현됐다.

이번 전시에선 그의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대표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가 관람객에게 이야기 걸기를 시작한 첫 작품이라고 설명하는 대작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 아직도 서 있는…’의 옆엔 1994년 쓴 육필 작가 노트도 재현해놨다. 직설적인 작품들 사이에 산동네 집으로 향하는 이의 뒷모습을 가로등으로 비춘 ‘귀가’ 골판지로 입체감을 살린 매혹적인 푸른빛의 연작 ‘달빛이 주목나무를 주목하네’ㆍ‘달빛과 주목나무’ 같은 서정적인 그림도 눈에 들어온다.

전시는 내년 1월 5일까지 열린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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