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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이슈 미술의 세계

[ESC] 미역 줄기에서 시작한 여행, 전기 통하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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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서둘러 보면 좋은 전시들

자연을 담은 ‘김순기전’·‘성균관’을 둘러싼 볼거리

한일 어민들의 삶 조망한 전시도 볼만

‘전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흥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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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2020년까지 한 달 남짓 남았다. 그 말은 2010년대의 내가 감동한 전시 목록을 작성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이다. 같은 전시도 해를 넘겨 ‘2020’과 조응하면 그 맛이 다르다. 예술은 시간의 숨결을 먹고 생존하고 나이 든다. 올해가 가기 전에 서둘러 봐야 할 전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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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삼청동 초입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방문하면, 한국 초기 비디오 아티스트 김순기의 개인전 ‘김순기 : 게으른 구름’과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 : 미술과 사회 1900-2019’, ‘엠엠시에이(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모임 게더링(Gathering)’을 함께 볼 수 있다.

‘김순기 : 게으른 구름’은 1946년생 작가 김순기가 지은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1975년 서울 미국문화원에서 ‘김순기 미술제’라는 프로젝트가 열렸고, 아트선재센터 등에서도 작품을 선보인 바 있지만, 그의 리듬감 넘치는 영상과 장난기 있는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은 이번 전시가 국내에서는 처음이다. 전시 소개 글에는 ‘자유롭게 변화하며 하늘에 스스로 길을 내며 흐르는 구름’이라는 문구가 있다. 점선면의 도형이 짙은 녹색 나무가 가득한 자연을 만나 변형되고, 모국어와 외국어가 흰 종이에서 같이 조율하는 시각 이미지가 전시장에 촘촘하다. 2020년 1월27일까지 열린다.

‘김순기전’이 열리는 전시장 맞은편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바다를 사이에 둔 연구 기반 전시가 열린다. ‘미역과 콘부(다시마)-바다가 잇는 한일 일상’는 한창 예민한 한일관계에서 미역 한 톳을 묶어 올린다. 제목 ‘미역과 콘부’는 바다 곁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가리킨다. 전시장에서 처음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바다 사람들의 삶이다. 푸른 광경으로 집약되는 바다 주변의 노동이 전시장에 펼쳐진다.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는 생선 가게의 풍광이 재현돼 있다. 한국과 일본의 어부가 어떤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살았는지를 조명하는 신앙(한국의 장군 신앙)과 그들이 직접 일구고 가꾼 기술도 흥미롭다. 그러니까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올리는 기도에 필요한 믿음의 세계와 직접 물로 뛰어들어 각종 어류를 그물에 담는 데 필요한 작살 등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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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과 콘부’ 전시에서 사물과 사람이 병행하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먼저 사물, 1960년대 제주도 해녀가 썼던 물안경과 일본 오키나와현에서 쓰인 뭉뚝한 목제 물안경을 비롯해 해녀들이 입었던 광목으로 짠 튼실한 옷 등을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안경을 쓰고 바다 속을 들여다보았던 여성들의 삶이 전시장 곳곳에 존재한다. 전시장에는 지금 요리책처럼, 무엇을 어떻게 버무려 먹어야 맛있는지 그림과 글로 기록해둔 12세기 일본의 책 <유취잡요초>도 있다. 그러나 평화로운 관망의 기록만 있던 것은 아니다. 바다를 가운데 둔 싸움, 그 싸움을 풀고자 했던 매뉴얼을 담은 문서도 있다. 1909년 서적 <향리동 증명서>에는 일본 어민이 경남 거제에 멸치 가공시설을 무단으로 설치하려고 해 갈등이 발생하자 양국 어민들이 서약한 내용이 담겼다. 문서에는 첫째, 길에서 여자들에게 음담패설 하지 말 것, 둘째 어업을 통해 서로 상업 활동할 것 등의 약속이 적혀있다. 민속과 예술이 겹치는 장면을 보느라 눈이 바쁘다. 그러다가 전시장 한 곳, 눈부신 바다를 품은 영상에 멈춰 가만히 앉아있기에도 좋다. 2020년 2월2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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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자신이 역사에 관심이 많고 과거의 시간을 다시 목격하고 싶다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에 발걸음을 옮겨도 좋다. 2020년을 코앞에 둔 지금 과거와 미래는 여전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듯 너무도 쉽게 서로를 훔쳐본다. 2020년이 눈앞에 온 상황에서 아주 먼 과거의 장소,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는 공간을 주제로 한 전시도 오늘의 우리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뒤통수가 시리다. 전시 ‘성균관과 반촌’은 묵직하게 과거의 특정 공간 속을 집중 조명한다. 전시는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지금의 대학로 주변의 모습을 비교한다. 그 옛날엔 성균관을 둘러싸고 흐르는 ‘반수’(泮水)가 있었고, 그 주변의 마을을 ‘반촌’(泮村)이라고 불렀다. 물이 반밖에 흐르지 않는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반수만 건너면 성균관으로 갈 수 있었으니 성균관 공노비인 ‘반인’(泮人)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반촌에 자리 잡았다. 전시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스스로를 선택하는 자라 생각했던 이들과 푸줏간에서 일하며 성균관 근처에서 살았던 반인들의 삶을 위트 넘치게 보여준다. 유생들을 가까이했던 반촌의 주민들은 배움의 열망을 시로 표출하거나 서당의 훈장이 돼 반촌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단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화면을 쓱 문지르면 그만인 지도, 성균관 가는 길 등 다채로운 풍경을 조선시대 붓을 든 반인들이 꼼꼼하게 앉아 그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2020년 3월1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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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추천하는 전시의 주제는 ‘전기’다. 전시장에 전기를 둘러싼 각종 시각 문화를 옮겨온 ‘전기우주’는 우리가 2020년의 미래로 건너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에 대한 얘기다. 전기란 무엇인가? 어렸을 때 하던 정전기 놀이, 친구의 손을 꽉 잡았다가 마치 전기가 통한 듯 잠깐 어지러운 척하기, 병렬 직렬 전구 연결하기 등 어른이 되기 전에 배운 ‘전기’ 말고는 정전, 번개, 전깃줄 정도의 인상만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전기우주’에서 전기의 맛을 봐볼 만하다. ’문화역 서울 284’에서 열리는 ‘전기우주’는 당인리발전소(구 서울화력발전소)의 기록과 전기에 대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전력 생산을 멈춘 당인리발전소를 찾은 공동 기획자 이영준은 거기에 있는 사물들을 전시장으로 가져왔다. 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라고 말하는 기획자는 전시장에 당인리발전소의 도면, 실물 등을 배치했다. 발전소에 찾아가 안전모를 쓰고 안전 서약서를 작성하고 공간을 둘러보며 모티브를 찾은 미술가들의 작업도 배치했다. 서울역 광장의 날 선 기운을 받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사진가 신경섭이 찍은 당인리발전소의 기록 사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발전소가 물과 불을 어떻게 끌어다 쓰고 펌프질하는지를 그래프와 숫자, 암호 같은 작은 글자들이 올라선 도면 등으로 드러낸다. 이응노 화가가 1969년께 수묵담채로 그린 당인리발전소의 풍경화도 볼 수 있다.

‘전기우주’ 전시에서 당인리발전소가 전기 생산을 멈춘 서울의 한 공간,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는 기념비적인 공간으로 자리한다면 사람들의 삶에 빠질 수 없는 전기를 다루는 ‘전기와 일상’ 파트도 전시장에 있다. 박길종이 만든 ‘서울역 전파사’는 전기 관련 물품을 수리하는 한편 각종 재료를 팔던 전파사를 전시장에 재현한다. 경양식 식당이었던 서울역사 2층 그릴에는 붉은색 카펫이 깔려있는데, 그곳에서는 1900년께 제작된 국내 최초의 토스터와 헤어드라이어, 밥통 모양으로 생긴 철제로 된 전기세탁기 등이 긴 줄로 도열해 있다. 2019년 12월13일까지 열린다.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이 함께 사느라 우리의 2010년대는 무지하게 바빴다. 2020년의 시공간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가뿐하게 출입구를 찾아 이동할 수 있기를.

현시원(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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