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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세상의 차별과 혐오…선한 영향력으로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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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방향을 바꾸려면 많은 힘이 필요하다. 질량(m)이 크면 변화(a)에 둔하다. 이것은 뉴턴 이래 인류가 지구를 살아내는 기본 원칙인 가속도의 법칙(F=ma)이었고, 유사 이래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쇼생크 탈출'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븐'을 쓴 세계적인 스토리텔러 스티븐 킹(72)의 상상력 속에선 인간의 물리법칙도 동력을 상실하고, 그로써 다시 재의미를 획득한다. 상상의 힘이다.

스티븐 킹의 신작 장편 '고도에서'(황금가지 펴냄)가 출간됐다. 호러와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로 독자의 심장을 쥐었다 놨다 하던 작법은 느껴지지 않지만, 오히려 부드러움과 상냥함으로 전혀 새로운 느낌을 만날 수 있는 소설이다. 차별과 혐오와 소외에 다가가려는 다정다감한 시도에 천천히 책장을 넘기다가도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어, 어' 하며 몰입도가 최고조에 이르는 소설이다.

스콧 캐리란 이름의 주인공이 처한 기이한 상황 묘사가 일품이다. 느닷없이 몸무게가 줄어드는 불치의 병에 걸린 스콧은 무엇을 입든 들든 쥐든 체중계 위에서 무게가 똑같다. 외관상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음에도 몸무게가 매일 0.5~1㎏씩 급격히 줄어든다. 언뜻 봐도 120㎏은 너끈히 넘을 듯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90㎏에 못 미치고, 시간이 지나면서 스콧의 몸무게는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중력과 비정상적으로 이별 중인 스콧은 무의미한 병원 치료를 거부한다. 대신 줄어드는 자신의 몸무게를 이용해 동성혼이라는 이유로 이웃에게서 멸시받던 한 부부를 지역 마라톤 대회에서 돕는다. 당초 관계가 껄끄러웠던 스콧과 부부는 단 한 차례의 선의(善意)를 나누며 새로운 관계의 물꼬를 튼다. 오해가 눈 녹듯 사라진 자리에서 그들은 한 자릿수로 진입한 스콧의 몸무게와 마주한다.

스콧의 몸무게가 '1㎏'에 이르는 마지막 장면에선 깊은 생각이 불가피하다. 인간은 한 자릿수의 몸무게로 태어나 결국 뼈만 남기고 휘발되는 물리적 존재였다는 각성이 온다. 스콧의 몸무게가 제로(0)에 수렴해 가는 모습은 모든 존재의 원점이자 모든 시간의 시작점으로 회귀할 운명인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질량과 시간에 집중한 건 아마도 스티븐 킹이 처음은 아닐까.

시간이라는 영원의 스펙트럼을 거꾸로 질주하며 이윽고 '증발'해버리는 스콧은 죽음이란 이름의 "결승선"에 다다르고야 만다. 그의 친구들은 말한다. "이건 당신이 이겨야 할 경기야. 당신이 끊어야 할 테이프라고." 최후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스콧처럼 선한 영향력만을 세상에 남긴 채 떠날 수 있을까. 거품과 기름기를 쫙 빼고 오직 담백한 시선으로 인간 본질을 사유하는 소설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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