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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중국인이 되고 싶다"는 마카오 "완전한 독립해달라"는 홍콩, 엇갈린 `중국 정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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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258]

"마카오는 5년 만에 모든 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룩했다."

"홍콩 당국자들은 지난 7년간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라."

2004년 12월 20일.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된 지 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입이 닳도록 마카오에 대한 칭찬을 쏟아냈다.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성공 모델." 45만명의 마카오 시민들 사이에 친중(親中) 정서가 넘쳐나고 그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26.8%를 기록한 상황을 후진타오는 이렇게 요약했다.

마카오에서 불과 65.7㎞ 떨어진 홍콩에 대한 평가는 이날 정반대였다. 후진타오는 행사가 끝난 직후 둥젠화 당시 홍콩 행정장관을 불러 20분간 공개적으로 문책했다. 2003년 7월 홍콩 시민 50만명이 '기본법 23조(국가보안법)' 입법 철회 시위에 나선 데 이어 2004년 7월 45만명이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책임을 추궁한 것이다. 홍콩 언론은 "둥젠화의 얼굴이 빨개졌고, 너무 당황해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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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8일. 홍콩 도심에 80만명의 시민이 모여 행정장관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거리에 나섰다. /사진=블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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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꾸러기 홍콩, 모범생 마카오

15년이 지난 2019년 마카오는 여전히 '일국양제' 모범생이고 홍콩은 말썽꾸러기다. 지난 6월 9일 '범죄인 인도 법안' 철회 요구가 발단이 된 민주화 시위는 홍콩 역사상 최고 수준의 반중(反中) 정서를 끌어냈다. 시위 첫날 홍콩 시민 750만명 중 100만명이 시위에 나섰고, 한 달 뒤에는 200만명이 거리로 쏟아졌다. 요동치는 민심은 11월 24일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이 의석 88%를 석권하는 압승으로 이어졌다. 7월 마카오에서는 친중 호얏셍 전 마카오 입법회 주석이 행정장관에 단독 출마해 선거위원 400명 중 392명(98%)의 지지표를 얻어 당선됐다. 이에 반대하는 정치적 목소리는 없었다.

△왜 마카오는 더 친중인가

홍콩은 1997년 영국으로부터 반환됐고, 2년 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중국에 양도했다. 반환 이후에는 모두 '특별행정구'로 분류돼 50년간 반환 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일국양제가 적용됐다. 자본주의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두 사회가 '중국 정서'에서 엇갈리는 이유는 뭘까.

반환 이전부터 중국이 두 사회에 미친 영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발표된 '홍콩과 마카오 자치주의에 대한 사회지지도 비교연구' 논문에 따르면, 마카오와 홍콩에서 발생한 공산주의 폭동이 진압되는 양상의 차이가 그 이후의 대중(對中) 관계 행보를 갈랐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본토를 휩쓸었던 1966년. 자본주의 체제의 마카오·홍콩에서도 '마오주의'에 경도된 공산주의 집단이 득세했고, 중국 정부는 뒤로 이 단체들을 지원했다. 1967년 7월 홍콩에서 시민과 학생, 공산주의자 등은 반영(反英) 폭동을 일으켰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을 발동하고 대대적인 체포 작전에 나섰다. 긴급법이 발동되면 범죄인에 대한 즉각적인 체포, 추방이나 수색뿐 아니라 종신형, 재산몰수형까지 처할 수 있다. 사실상 계엄령이다. 공산주의 세력은 홍콩에서 일망타진됐고, 영국과 중국 정부는 서로 적대했다.

포르투갈령 마카오 총독부는 같은 해 벌어진 공산주의 시위 진압에 실패한다. 소요를 끝내기 위해 공산주의 단체와 노조의 요구를 수용했고, 이에 더해 중국과 포르투갈 경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출판물, 라디오나 방송 등도 허용됐다. 영국에 비해 마카오 관리에 소홀했던 포르투갈은 공산주의·친중 단체의 영향력이 뻗쳐나가는 상황을 관망했다.

영국과 포르투갈이 각각 중국과 체결한 반환 협정 내용도 그 이후 두 사회의 자치주의에 대한 관심 차이를 발생시켰다. 영국은 중국과의 홍콩 반환 협정에 '보통 선거' 약속을 포함시킨 반면, 마카오는 보통 선거에 대한 약속 없이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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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 카지노 밀집 지구의 모습 /사진=블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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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1일 홍콩 총독부의 유니언잭이 내려지고 오성홍기가 올라갈 때 홍콩 주민은 대대적인 시위를 열었고, 1999년 12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 500명이 마카오에 입성했을 때 마카오 주민 수만 명은 꽃을 들고 열렬히 환호했다. 두 풍경은 이미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진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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