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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역사와의 대화] 조선 왕의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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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을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가 상영된 데 이어 그의 과학기술 업적을 조명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도' '관상' '광해, 왕이 된 남자' 등을 보더라도 왕은 한국영화의 단골 소재다. 최근 영화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는 세종은 역대 왕 중 우리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조선 왕으로는 세종을 비롯해 개국시조 태조, 1·2차 왕자의 난으로 왕좌를 차지한 태종, 계유정난·사육신 사건의 세조와 그에게 희생된 단종, 18세기 문예 부흥을 이끈 영조, 정조 등이 귀에 익다. 연산군은 폭군으로 각인됐고 선조, 인조도 전란을 자초한 무능한 임금이란 오명이 따라다닌다.

'태정태세문단세-'로 암기한 왕의 호칭은 생전에 부르던 이름이 아니다. 죽은 후 종묘에 신위를 봉안하며 올리는 '묘호(廟號)'인 것이다. 그런데 묘호 뒷글자가 어떤 왕은 '조(祖)'이나 어떤 왕은 '종(宗)'이다. '예기'는 "나라를 세운 자는 조, 계승한 자는 종이 된다"며 '조종원칙'을 명시한다. 중국은 이를 고수해 시조만 조를 썼다. 우리도 고려의 경우 태조 왕건만 조였는데 조선에 들어와 선대 왕을 추숭하기 위해 조를 남용한다. 조선법전인 '경국대전'은 "공이 크면 조, 덕이 크면 종이라고 한다"고 제시한다.

조선도 초기엔 조종원칙이 준수됐지만 세조 때 무너졌다. 신하들은 신종, 예종, 성종을 올렸으나 예종은 "부왕이 왕실을 위협하는 무리를 제거하고 이징옥·이시애 난을 평정해 종사의 중흥을 도모했으며 아우로서 형인 문종을 계승했다"는 논리로 세조 묘호를 기어코 성사시킨다. 이 일은 후대에 지속적으로 논란이 된다. 선조는 "(명나라 '대명회전' 등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표기된)종계를 바로잡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선종에서 개칭됐다. 윤근수, 이사경과 홍문관이 "세조 이후 200년간 조라 칭한 이가 없다"며 불가를 외쳤지만 광해군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내세울 공적이 없는 인조는 조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효종은 인조가 죽은 지 7일 만에 묘호를 열조로 정했다. 열조는 유비의 소열(昭烈)에서 따온 것으로 분수에 넘치는 칭호라는 지적이 비등했다. 이후 헌종이 검토됐다가 최종적으로 인조가 채택됐다. 심대부가 상소를 올려 "반정을 통해 연산군의 더러운 혼란을 평정한 중종도 단지 종이라 한 것을 우러러 본받아야 한다"며 반대했다. 화가 난 효종은 그를 귀양 보내고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순조도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조를 받았다. 그는 순종이었으나 1859년(철종 9) "문무를 고루 갖추었고 서학을 배척하고 홍경래의 난을 평정했다"는 이유로 칭조가 결정됐다.

영조와 정조는 한참 후대인 고종 때 변경됐다. 영조는 영종이었지만 1889년(고종 26) "업적을 감안할 때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고종의 문제 제기로 영조로 개칭됐다. 정조는 정종이었다가 고종이 1899년(고종 36) 황제로 즉위해 조상의 지위를 격상하면서 성조, 경조, 정조 등 후보 중에서 정조가 낙점됐다. 추존왕인 장종과 익종도 장조와 익조로 함께 고쳤다. 드물게 묘호 앞글자가 분란이 된 적도 있다. 성종은 '인'으로 할지, '성'으로 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사실 선왕 묘호를 높이는 이면에는 왕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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