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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꿈을 위해 땀 흘리는 연습생 펭수… '올해의 인물'로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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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헤겔'노예의 변증법'과 펭수

조선일보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남극에서 태어나 '뽀로로 선배님'처럼 되기 위해 스위스를 거쳐 한국에 온 열 살짜리 펭귄이자 EBS 연습생인 펭수의 인기가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실로 이례적인 현상이다. 뽀로로가 전 세계적인 인기몰이를 한 바 있긴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목표 시청자층인 어린이를 넘어 20대에서 30대에 걸친 일부 젊은 성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둘째 주 현재 유튜브 구독자 수는 125만을 넘겼고, 한 취업 포털 사이트에서는 송가인, BTS 등과 더불어 '올해의 인물'로 꼽히기까지 했다.

문화비평가들은 펭수의 인기 비결로 연습생이면서도 '할 말은 한다'는 것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사이다 캐릭터'라서 인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반항하고 시비를 걸며 조롱하는 것은 아동용 캐릭터들이 두루 갖는 속성이다. 가령 둘리는 공룡이 아니라 사람인 어린이로 기획되었으나, "어린이가 어른에게 대드는 모습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검열의 압박으로 인해 공룡으로 설정이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외계인을 통해 초능력을 얻고 빙하 속에 갇힌다는 설정이 추가됐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고 툴툴거리고 입바른 소리 하는 건 펭수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하고도 특별한 장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뚱한 표정에 툭툭 쏘아붙이는 말투를 구사하지만 잘 따져보면 펭수는 바른 생활 태도를 갖고 있는 모범적인 아이돌 연습생이다. 오늘도 EBS 창고에서 잠을 자지만 크리에이터로서 꾸준히 영상을 찍고 인스타그램에서 팬들과 소통하며 진정한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바로 그런 펭수에게 2030세대가 열광하고 있다. 대체 펭수는 어떤 시대정신을 표상하고 있는 것일까?

시대정신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뒤적거려 보자. 펭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헤겔? 뜬금없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펭수 자체가 뜬금없이 등장해 스타가 되었다. EBS에서 만든 아동용 캐릭터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까지 만나 농담을 주고받을 거라고,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누가 알았겠는가? 펭수가 일약 스타가 된 이 현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다.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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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에게 인간이란 동물과 다른 존재다. 인간이나 동물 모두 다른 존재를 잡아먹고 생명을 유지하며 번식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인간은 자기인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가 자신을 더 많이 인식하고 인정하며 존중하고 떠받들어주기를 바라는 존재가 발생할 것이고, 갈등이 불거지게 된다. 이렇듯 상대, 혹은 타자로부터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을 인정투쟁이라고 부른다.

인정투쟁에서 승리한 자는 '주인'이 된다. 더 이상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다. 패배자인 '노예'가 가져다준 것을 입고 먹고 누릴 뿐 직접 자연과 맞서지 않는다. 노동하지 않는 주인은 이미 승리한 자신의 자의식 속에만 함몰될 뿐이다. 그러한 주인의 의식을 헤겔은 '불행한 의식'이라고 부른다. 반면 노예는 주인에게 강요된 봉사를 하기 위해 더 넓은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맞닥뜨리며 노동한다.

불행한 의식에 갇힌 주인의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만 나온다. 반면 노예는 땀을 흘리며 굵은 근육을 키워나간다. 결국 노예는 주인을 능가하는 존재가 된 스스로를 깨닫게 된다. 불행한 의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주인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뒤늦게 알아채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노예가 주인이 되고, 주인이 노예가 되는 날이 오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 부른다.

인정투쟁에서 출발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이어지는 이 웅장한 서사는 헤겔 이후 수많은 철학자를 매료시켰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의 의미를 사회 문제에 적용한 책 '인정투쟁'을 썼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예가 주인을 이기게 되는 원동력인 '노동'에 집중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마르크시즘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이렇듯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정답은 없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투쟁하고 사랑하며 발전하는 존재이며, 부정을 통해 긍정에 도달한다는 헤겔 철학의 핵심적 사유를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

펭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펭수는 "안 될 거야 아마" 같은 표현으로 대표되던 소위 '루저 감성'과는 다른 맥락 위에 서 있다. 펭수의 꿈은 데뷔하는 것이지 퇴사하는 게 아니다. 꿈을 갖고, 노동하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제 삶의 주체로 우뚝 서려 한다. "노는 게 제일 좋아"라고 노래하는 뽀로로와는 다르다. 열 살 펭수는 창고에서 자는 연습생이자 유튜브 크리에이터로서 노동을 한다. 주인의 자리에 서기 위한,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캐릭터. 그래서 펭수는 다르다. 그리고 스타가 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제법 친숙한 서사 구조라고 볼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연습생 신화' 혹은 '자수성가'의 이야기들이 대체로 그렇다. 작곡가 사무실을 떠돌며 허드렛일을 하던 최홍기는 한 번의 기회를 잡아 나훈아가 되었고, 11년 차 연습생 권지용은 지드래곤이 되어 솟구쳤다. 빙그레 이글스에서 월급 45만원을 받던 한 연습생은 손바닥의 굳은살을 칼로 깎아내며 연습했다. 전설의 4번 타자 장종훈이다. 정직한 노력을 쏟아붓는 이들의 뜨거운 눈망울, 그 속에 스스로의 인생과 세상을 바꾸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펭수의 '한국엄마' 이슬예나 PD 스스로가 그랬다.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던 그는 연봉이 20%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며 직장을 옮겼다. 자신에게 아무런 결정권 없이 그저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이 헛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바란 것은 '힐링'도 '워라벨'도 아니었다. '내 일'로 느껴질 수 있고 헌신할 가치가 있는 노동이었다.

노예에서 주인이 되려면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의미가 있다면,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온다면, 청년들은 기꺼이 일한다. 펭수도, 펭수의 '한국엄마'도, 지친 퇴근길에 유튜브로 펭수를 보며 위안을 찾는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연습생이다. 데뷔의 꿈을 놓지 말고, 오늘도 힘을 내자.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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