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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나'를 지키기 위해… 뇌는 없는 세상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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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으로 아내도 낯설어하는 환자·꿈꿀 때 앞을 보는 시각장애인 등

뇌 손상 환자의 기이한 경험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역할 드러내

조선일보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엘리에저 스턴버그 지음|조성숙 옮김|다산사이언스|432쪽|2만8000원

두뇌가 눈을 통과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면 인간은 카니자 삼각형〈그림〉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우리 눈에 삼각형이 보이는 이유는 눈이 보낸 정보를 뇌가 '해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각은 빈틈을 메우고 외곽선을 그어가며 존재하지 않는 흰색 삼각형을 만든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뇌는 이런 식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예일대병원 신경과 의사인 저자 스턴버그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연구를 통해 뇌의 신비를 밝혀온 뇌과학자다. 또한 뇌과학이 축적해온 지식을 대중의 언어로 바꿔 전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온 과학 저술가이기도 하다.

의식과 무의식은 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는 정신의 수호신이고, 이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때론 거짓을 동원해가며 적극적으로 세계를 만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뇌가 손상된 환자들이 겪는 기묘한 경험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주를 들려준다. 각각의 사례마다 '시각 장애인은 꿈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좀비도 차를 몰고 출퇴근을 할 수 있는가?' '왜 사람들은 외계인 납치설을 믿는가?' 등 호기심을 돋우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독자를 뇌과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조선일보

카니자 삼각형


시각장애인도 꿈속에서 앞을 본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사람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아무것도 못 본 사람조차 꿈속에서 해변을 배경으로 멋진 이성과 사랑을 나누는 꿈을 꾼다. 이 꿈에 무의식이 개입한다. 색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기 때문에 꿈을 꾼 이는 푸른 바다를 차가움으로, 붉은 태양을 뜨거움으로 치환해 본다.

무의식은 인간을 좀비가 되게 한다. 익숙한 출퇴근길을 자가용으로 오가는 운전자는 중간에 무엇을 봤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습관적으로 운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습관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뇌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리한 뒤 무의식에 운전을 맡긴다. 할 일이 없어 여유가 생긴 의식은 다음 날 있을 회의나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생각에 빠져든다.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것도 무의식 덕분이다. 팝 가수 빌리 조엘은 '피아노맨'을 부를 때 의식과 무의식에 역할을 분담시켰다. 하모니카를 불 때는 악보를 보며 연주하고, 피아노는 무의식 상태에서 손가락이 자동적으로 건반을 칠 수 있을 만큼 반복 연습했다.

퇴근길에 우유를 사오라는 아내의 부탁을 깜빡하는 것은 아내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의 주도권 다툼에서 의식이 패퇴한 탓이다. 인간의 기억은 절차 기억과 사건 기억으로 나뉘는데, 운전기술은 절차 기억이고 우유 심부름은 사건 기억이다. 문제는 인간이 절차 기억을 쓸 때, 사건 기억은 차단된다는 점이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포착했듯, 뇌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목표는 자아 정체성을 지키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이로 인해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편도와 해마, 관자엽이 쪼그라든 카프그라 증후군 환자는 남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아내조차 감정적으로 낯설어진다. 환자는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민다. 지인들이 모두 얼굴만 같은 가짜로 바꿔치기 됐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조선일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석류 주변을 날아다니는 꿀벌 한 마리에 의해 깨어나기 직전의 꿈'(1944). 뇌가 지닌 이야기꾼의 속성을 잘 포착했다. /ⓒ 2014, Museo Thyssen-Bornemisza/Scala, Flo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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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아내가 바꿔치기 됐다고 믿게 된 한 남자는 아내와 동침할 때마다 "아내에겐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했다. 졸지에 정부 취급을 당한 아내는 남편이 자기와 바람피웠다는 사실에 상처받는다.

거론된 사례들 가운데 다중인격장애는 연민과 경외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자아를 여럿 만든 뒤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억을 이 자아들과 함께 마음의 감옥에 가둔다. 특정 상황에서 숨어 있던 자아가 튀어나오는데, 그럴 때면 목소리와 성격만 바뀌는 게 아니라 심지어 시력까지 달라진다.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의 노력은 이처럼 철저하다.

과학책이지만 소설처럼 읽힌다. 각 장(章)은 질문으로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새로운 질문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질문과 해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인간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에 도달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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