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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백영옥의 말과 글] [128] 할머니처럼 늙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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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할머니에게 빠져 있다. 칠십이 넘은 용인 할머니와 칠십이 다 된 밀라노 할머니. 한 명은 ‘코리아 그랜마’라는 이름의 박막례, 다른 한 명은 ‘밀라논나’의 장명숙이다. 용인 할머니는 50년 가까이 식당 일을 했고, 밀라노 할머니는 패션 업계에서 일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할머니들을 보는 게 즐거웠다. 막례 할머니의 1000원짜리 립스틱 하울(쇼핑한 것을 보여주며 품평하는 유튜브 용어)과 밀라노 할머니의 아르마니와 아스페시가 든 옷장이 전혀 달라도 삶의 내공만은 가득했으니 말이다.

70년 넘은 할머니의 옷장, 30년 전 아버지가 입던 셔츠, 시아버지의 마고자 단추로 만든 귀걸이, 낡은 옷의 괜찮은 부분만 잘라 리폼한 20년 된 재킷을 어떤 사람의 옷장에서 볼 수 있을까. 추석 선물용 황금색 보자기를 버리지 않고 망토처럼 두른 채 머리를 자르는 밀라노 할머니의 솜씨에 반해 가위를 검색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막례 할머니의 요리 비법은 어떤가. 비빔, 간장 국수 레시피를 보다가 배가 고파져 물을 끓인 건 나뿐인 걸까. '친목계란 무엇인가'라는 강의에서 "니들은 친구 있냐?"고 직언하고, 어디에나 붙는 "엠병!" 같은 추임새에도 흥이 나는 건 할머니가 '편들'이라 부르는 구독자에 대한 정 때문이다. '나이듦의 반전'의 저자 에릭 라슨은 말했다.

"40대와 50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60대와 70대에 접어들어서야 느끼는 자유로움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당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어차피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해방감을 느낀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네 구박덩어리가 된 미혼모 동백이와 아들 필구를 처음 품어준 것도 덕순 할머니였다. 이런 할머니들을 보니 나이 드는 게 덜 무서워진다. 밀라노 할머니의 자연산 백발은 백발대로, 박막례 할머니의 장식용 가발은 가발대로, 이판사판 볼 것 없이 내 판으로 사는 모습이 멋지다. 툭툭 던지는 말도 어록이 되니, 이 또한 인생을 살아낸 업력과 공력이 아닌가.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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