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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 생의 마지막에서 배우는 건 오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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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파 돌봄노동자, 요양보호사 이은주
"나에게 요양원은 하늘정원, 노인들은 뮤즈와 제우스"
"생의 마지막 공간에서 배우는 건, 오직 사랑"
"AI 노인 돌봄? 따스함과 인간미 못 따라와"
"잘 나가는 사람보다 막노동하던 자식이 효도"
"부모 요양원 보낼 때 죄책감 없어야 잘 찾아와"

조선일보

‘미야자키 하야오로의 초대' 등 몇 권의 책을 번역한 일본문학 번역가이자 요양보호사 이은주. 유학까지 다녀온 실력파다. 3년간의 파란만장한 돌봄 노동을 담은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를 펴냈다./사진=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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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언젠가는 이들 뮤즈와 제우스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갈아주기 전까지는 축축한 기저귀에 몸을 맡겨야 할 것이다. 누군가 내 입안에 숟가락으로 죽을 넣어주기 전까지는 목이 마른 것도 견뎌야 할 것이다. 누가 내 손과 발을 어루만져주기까지는 담요 밖으로 갑갑한 발을 빼내지도 못할 것이다. 열정에 가득 찬 봉사자에 의해 억지로 간식을 먹어야 할 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침대 곁에서 내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어 줄 봉사자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난 딸에게 부탁해 두었어. 1주일에 한 번은 엄마 보러 와서, 옷 싹 갈아입히고 손발톱 싹 정리해 줘, 라고." "지금 같으면 잘해드릴 텐데. 그땐 몰랐어. 후회가 됐어. 지금도 엄마가 그리워"’

-논픽션 에세이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 중에서.

번역가 이은주가 일본어 활자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낸 첫 책은 돌봄 노동을 옮긴 책이다.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후 지난 3년간 그가 돌본 노인들, 요양원의 풍경과 생의 마지막 시간을 정직하게 기록했다.

기저귀를 적시는 오줌처럼 갈피마다 고독과 고통의 냄새가 진동할 줄 알았건만, 생의 막바지에서조차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노인들의 일상의 전투에 눈물과 웃음이 차고 넘친다. 우리의 보호자였던 부모가 늙고 병 들 때,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바쁜 나를 대신해 어떤 보호를 받게 될 지가 한눈에 보인다.

그가 뮤즈와 제우스라고 부르는 노인들은 냉장고의 음식을 탐하고, 잠이 안 온다고 투정을 하고, 악몽을 꾸고, 사막의 조난자처럼 밤새 생과 사를 오가다가도, 아침이면 다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낸다.

"아줌마, 우리가 둘이 사나? 둘이 사는구나!" "아이 맛있어. 이 아까운 걸 다 먹었다" "자네, 예뻐" "화이팅!" "제가 공부를 많이 해서 의사가 되면 병을 낫게 해 드릴텐데… 좋아요? 괜찮아요?" "아무 걱정 마세요. 제가 다 해드릴게요"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 요양보호사와 노인들의 대화의 기록은 어찌나 짠하고 어여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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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지금 노인 복지 시스템의 황금기에 와있다. 65세 이상이면 등급에 따라 요양원, 데이케어센터, 재가 방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논픽션 작가이자 요양보호사인 이은주를 시립서부노인요양전문센터에서 만났다. 곳곳에 대청마루와 뒤주, 원예 화분과 중정 등 노인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이은주는 23살 때부터 입었다던 청 앞치마를 두르고 인터뷰 자리에 나왔다. 갑옷처럼 앞치마만 두르면 두렵지 않고 어디든 폼나게 활보할 수 있다고 했다.

-왜 돌보는 노인들을 뮤즈와 제우스라고 부르지요?

"누군가의 소중한 엄마, 아빠였잖아요. 삶의 전쟁터에서 혼신을 다해 사셨고요. 나의 뮤즈, 나의 제우스로 관계를 맺으면 제 손길이 좀더 다정하고 공손해져요. 이분들을 하늘 정원을 사는 신화 속 인물이라고 상상해요."

-김혜자 선생이 알츠하이머로 나온 드마라 ‘눈이 부시게’의 엔딩에서 요양원의 풍경을 잠시 접했어요. 치매 환자들, 가족들, 그리고 밤새 돌아가시는 분들… 그곳을 지배하는 관계와 감정은 무엇인가요?

"느끼는 사람 마음이죠(웃음). 그날그날 일하는 내가 쓸쓸하면 요양원이 적막강산처럼 보이고, 내가 추우면 나의 뮤즈와 제우스들도 옷을 많이 입혀드려요. 공동생활에 당뇨 등 환자도 많아 개인 음식이 금지였는데, 저는 좀 유별났어요. 새우깡이나 떡볶이도 몰래 드렸죠. 어르신들이 정말 좋아하세요. 고맙다고, 너 오기만 기다린다고. 음식 하나로 분위기가 확 바뀌어요(웃음)."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나이 드신 부모님을 요양원에 맡기고 죄책감을 느끼는 자녀들도 많습니다. 가족들은 어떤가요?

"의사도 구청장도, 잘 나가는 자식은 얼굴 보기 힘들어요(웃음). 노동해서 하루 벌어먹고 사는 아들이 퇴근길에 쭈쭈바 한 봉지 사들고 와서, 판소리도 하면서 다른 노인들도 웃겨주고 가요. 며느님들은 남의 엄마인데도 계절별로 옷 싸서 오시고, 남자들은 자기 엄마인데도 꿩처럼 얼굴을 감추고 엄마 얼굴을 못보죠. 애틋해요."

요양원이면 매일이 잿빛인 것 같지만,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하루가 총천연색이라고. 금방 죽겠다고 하던 사람이 살겠다고 아우성치고, 귀여움과 부러움과 질투와 배려가 뒤섞여 엉뚱한 데서 눈물보와 웃음보가 터진다.

"옆침대 사람이 딸이 사준 꽃내복 입고 환해지면, 그게 부러워 자기 딸에게 전화해서 화를 내셔요(웃음). 미묘한 욕구를 가족에게 전달해주는 것도 저희 몫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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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으로 찾아온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인사하는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기억을 잃었어도 오로지 사랑했던 행동만은 남아 다리 불편한 아들을 위해 눈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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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가까웠어도 사는 건 다 비슷하다는 게 안도가 됐어요. 한편 함께 웃고 떠들던 존재가 어느날 문득 사라지면 그 공기가 얼마나 무거워질까도 싶습니다.

"간식을 주러 갔는데 그 사이에 숨이 멈춘 분도 있어요. 요양원은 어르신들이 동요할까봐 침대를 바로 치워요. 없었던 사람처럼. 그리고 바로 새 사람이 들어오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한쪽 벽에 사진 한 장, 꽃한송이, 물 한잔 놓아주고 잠시나마 애도하면 좋겠어요."

이별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다들 마지막을, 죽음을 너무 서툴게 보낸다고 그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식사를 챙기고 기저귀를 갈아주던 노인이 돌아가시면 요양보호사 또한 상실감을 견딜 수 없다고. ‘줄리엣비노쉬'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독거 노인이 돌아가셨을 때, 그는 홀로 애도하며 사진을 태웠다.

책 속에서 그는 요양원에서 100세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고 썼다. 하지만 눈을 뜨면 100세 노인의 침대로 가서 싹싹하게 말을 건넨다."따님이 78살인데, 앞으로 딸하고 같이 요양원에서 방 쓰면 좋겠다, 그쵸?" 짓무른 엉덩이에 콧노래를 부르며 로션을 발라준다. "개운하시죠?"

그렇게 시간당 1만원 남짓의 노동으론 환산할 수 없는 ‘섬기는' 인생, 변기물을 휘젓던 손으로 얼굴을 할퀴는 치매 어르신들을 어르고 달래는 그의 우아한 율동을 읽고 있으면, 그곳이 천국은 못되도 제법 살만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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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과 요양보호사에 관한 세밀하고 따스한 기록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


-어쩌면 말년에 어떤 요양보호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노년의 질'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가끔 TV에서 노인 학대하는 요양원 보고 기겁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일하면서 만난 요양보호사들은 다들 돌봄에 최선을 다하는 프로였어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뛰어다녀요. 다만 50대 여성들이 대부분이라, 돌봄에도 자기 주관과 스타일이 강해요(웃음). 가령 저는 눈꼽과 치아 위생을 중요하게 보는데, 다른 분은 영양이나 다른 걸 또 중요하게 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요양보호사에게 좋은 돌봄을 받고 싶으면, 제도와 인식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복지사, 영양사 등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아랫사람 대하듯 감시할 때, 방문 가정에서 파출부처럼 응대할 때는 크게 기가 꺾였노라고.

그가 마음을 추스려 자신의 ‘노동일기'를 인터넷에 올리고 책을 내자, 많은 요양보호사들이 함께 존재를 드러냈다. 힘든 곳에서 낮은 일을 하고 있다고 몸을 숨겼던 ‘50대 그녀들'이 "소중한 일이구나, 떳떳한 직업이구나" 자부심의 댓글을 달았다.

알고보면 이은주는 이 일에 ‘특화된’ 사람이다. 남동생을 돌보다 조카를 돌보았고, 지금은 혼자서 조카 손주까지 돌보고 있다. 번역 일로 생활이 해결되지 않아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우연한 기회에 노인 목욕 봉사를 했고 그 경험이 좋아 자연스럽게 요양보호사가 됐다. 요양원과 데이케어센터, 재가방문을 두루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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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도 자기 인생을 소재로 글을 썼잖아요. 저도 제 삶의 보상으로 글을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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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이 타인의 돌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인생인가요?

"가끔 그런 생각도 해요. ‘나는 왜 나를 착취하는가'. 하하. 그런데 이것도 제 기질이에요. 왜 과거에 통 큰 부자들이 그랬잖아요. "대장부가 태어났으면 100명은 먹여살려야지." 저도 그런 ‘기마이'가 있어요. 일단 내 동생, 내 엄마 돌본 다음에 내 일을 해야지. 문학적 성취를 이뤄야지. 그런데 제 손이 필요한 상황이 계속 생겼어요.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그걸 문학적 씨앗으로 승화를 시켰어요(웃음).

아니 에르노도 자기 인생을 소재로 글을 썼잖아요. 저도 제 삶의 보상으로 글로 써요. 어둡게 보면 진흙탕 같고 답답한 환경이지만, 내가 쓰면 그 삶이 예뻐지고 견딜만 해요. 동생, 조카, 손주 돌봄, 요양보호사, 번역… 다 내가 좋아서 했어요. 남을 위한 인생같지만 제 인생이고 제 선택이에요."

-정성과 사랑이 많은 요양보호사이면서도 당신은 요양원에서 100세를 맞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이유가 뭐죠?

"저는 혼자 자유롭게 제 집에 있고 싶어요(웃음). 공동 생활이 안맞아요. 노인분들도 각자 처한 환경과 기질이 다르잖아요. 그에 맞게 요양원, 데이케어센터, 재가방문 서비스를 선택하시면 돼요. 돌보는 입장에서도 저는 한꺼번에 여러분 돌보는 것보다 가정 방문해서 1인에게 집중하는 서비스가 더 잘 맞아요.

지금 저는 두 가정을 재가방문 서비스하고 있어요. 누워계신 어르신 살펴서 치과도 모시고 가고, 신경정신과도 모시고 가요. ‘죽을까 살까’ 망설이던 눈동자가 사랑받아서 꽃처럼 피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도 환해져요.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기쁨도 크고요."

요양원과 달리 방문요양보호사로서 그 집안의 방문턱을 넘다보면 한 가정의 살림과 가정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편과 아들이 2교대로 보초를 서던 ‘동성빌라’ 할머니 가정에선, 서로 힘들어도 백만불짜리 웃음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들에게 배려와 정성을 배운다. 때로 사랑은 ‘상대가 좋아하는 것 10가지를 해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 1가지를 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리도.

-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일단 화내면 안돼요. 보호사가 화내면 상태가 무조건 악화돼요. 그리고 탈의하고 씻는 것. 성별이 다르면 싫어하세요. 충분히 관계가 형성되고도 항상 노크하고 "저 왔어요"하고 예의를 갖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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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미하일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 집에서 맞는 노년과 죽음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노년과 죽음을 그린 영화 ‘아무르'를 보면 부인의 머리를 함부로 빗기는 젊은 간병인을 남편이 내쫓는 장면이 나와요. 누워서 움직이지 못해도 ‘자기 취향'을 존중받고 싶어하는구나, 깨달았어요.

"저희 엄마도 제가 터치하는 걸 싫어하세요. 영역을 넘으면 노여워하시죠. 어떤 분은 늦잠 자고 아침 대신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해요. 어떤 분은 마지막까지 기저귀 차길 싫어하시죠. 습관과 취향을 존중받는 게 되게 중요해요. 저도 늙으면 그렇게 존중받고 싶어요. 요양원에서 들어가도 집에서처럼 9시 넘어 늦게까지 깨어있고도 싶고요(웃음).

반대로 공동생활에 대한 오해도 있다고 했다.

"요양원에서 저녁밥을 일찍 주는 게, 관리자들 일손 줄이려는 걸로 알아요. 그런데 어르신들은 새벽 2시 쯤 일찍 일어나셔서 오후 5시면 졸려해요. 하염없이 저녁만 기다리죠. 요양원이 그렇게 차갑고 나쁜 곳은 아니에요."

-얼마 전엔 기품이 넘치던 여배우 윤정희 님이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웠어요.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라는 책도 권했는데, 치매 환자들을 돌보면서 느낀 바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대개 ‘아침이야? 밤이야? 나는 누구야?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빨리 집에 가야 하는데…’ 그러세요. 어떤 뮤즈는 밤새 일어나 헤매고 걸으셨어요. 처음엔 저도 ‘왜 그러실까?’ 화가 났지만, 이내 부끄러워졌어요. 나태주 시인의 시가 있어요.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폭력이나 공격도 있지만 분노조차 우리들 문제예요."

치매 노인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좋아진다고 했다.

저녁이 되면 요양원에도 쓸쓸한 공기가 퍼진다. "해질무렵증후군이예요. 아파도 석양이 지면 마음이 스산해지고 어딘가로 가고 싶은 거에요. 꼭 누군가 부르는 것 같죠."

-어르신들을 대할 땐 말 한마디가 무척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요. 뭐뭐 ‘하실게요'같은 이상한 존대가 아니라 친밀한 환대의 언어를 쓰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호텔 서비스처럼 해요(웃음). "저랑 춤 한번 추실래요?" "이렇게 해드리면 좋으시겠어요?" 뮤즈로, 제우스로 대접하면서 저의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애써요. 하하. ‘제가 멋있는 사람이라 좋은 걸 드린다'는 거죠. 그럼 그분들도 ‘화이팅' ‘고마워요'하면서 제게 가장 좋은 모습을 주세요.

먹고 배설하고 옷 갈아 입고… 이런 일이 사실 서로에게 얼마나 지치고 소모적이겠어요. 어쩌면 그래서 멋과 인격의 욕구도 커지죠. 오줌도 새고 죽도 흘리지만… 어리나 늙으나 ‘나 이렇게 존엄한 사람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아줘요'라는 간절함이 있어요."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뭐죠?

"음식이죠. 네모난 침대에서 할 수 있는 게 먹는 거니까. 미각만큼은 마지막까지 남아 금방 입속으로 삼킨 홍시도 아쉬워서 입맛을 다셔요. 그리고 사랑받는다는 느낌, 터치가 중요해요. 입술에 바세린 발라드리고 여윈 뺨을 쓸어드리면 환히 웃으세요. 꾸미는 것도 좋아하죠. 무기력한 사람은 씻지 않아요. 청결은 삶의 의지와 연관이 있어요.

데이케어센터에서도 할머니들은 식사 후에 꼭 손가방의 립스틱을 꺼내 새로 발라요. 저는 요양원에 찾아오는 자녀분들에겐 꼭 부모님 손톱 발톱 직접 잘라 드리라고 해요. 얼마나 기뻐하시는데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도 엄마는 목욕시키면서 손도 귀도 다 살펴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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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절한 간격을 감지하는 예민함과 그사이에 놓여있는 공간의 온도를 따뜻하게 어루만질 줄 아는 마음을 지닌 이은주./사진=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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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과정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뭔가요?

"욕창에 걸리지 않게 2시간마다 자세를 변경해요. 기저귀 케어를 하며 엉덩이에 로션을 바를 때가 좋았어요. 일단 체위를 변경하면서 스윽 스캔을 해요. 등을 보고 살이 눌려있으면 두드려서 순환을 시켜주고, 옷 주름도 펴드려요. 소변이 워낙 독해서 염증 생기지 않게, 바람 쏘이고 엉덩이 두드리면서 이런저런 말을 건네죠. 그때 가장 많은 소통이 일어나요."

-정서적 지지가 참 중요하겠습니다. 사람이 제일 좋은 약이지요?

"그럼요. 몸져 누워계셔도 "힘내서 걸어나가셔야죠." "나가시면,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 미래를 나누면 희망이 생기고 관계가 생겨요. 퇴근할 때 "저 다녀올게요"하면 "빨리 다녀와"하고 기다리세요. 식사도 못하던 독거 노인도 다정한 말을 들으면 리듬을 회복해서 싱싱해져요. 신기하죠. 요양원에 있다 집으로 복귀하는 분들도 생기고요. 제가 늘 얘기하지만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나아요(웃음)."

-늙어가는 부모님을 둔 자녀분들에겐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세요?

"(미소지으며)우리나라는 지금 노인 복지 시스템의 황금기에 와 있어요. 독일, 일본 해외 시스템과 비교해도 뒤질 게 없어요. 차상위계층, 가장 취약한 분들이 복지 1순위가 되도록 설계돼 있죠. 65세 이상 장기요양보험 수급자가 되면, 등급에 따라 요양원이나 데이케어센터, 재가방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요. 조금씩 다르지만 한달에 추가 비용이 5만원도 안들어요.

무작정 걱정할 것 없어요. 부모님 상태에 따라 자녀분들의 사정에 따라 선택할 수 있죠. 데이케어센터는 어린이집, 실버타운이나 요양원은 사립기숙학교, 일반기숙학교로도 비유해요. 규모 때문에 외곽에 노인시설이 생기는데, 크지 않아도 마을 안 요양원이 가장 좋아요. 그래야 주말에 교회도 가고 딸네집도 가요. 요양원 보내는게 버리는 게 아니니 죄책감 느끼실 것 없어요. 죄책감이 없어야 잘 찾아와요. 찾아뵈면 옷도 직접 갈아입혀드리고 스킨십 하고 드라이브로 콧바람도 쐬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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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100세 시대. 실버 시대를 대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다.


요즘엔 청소년들도 곧잘 요양원에 봉사하러 온다. 봉사 점수를 위해서지만, 그 과정이 씨앗이 되고 교육이 된다. 사랑과 돌봄은 관찰될수록 저축되고 선순환한다. 처음엔 침 흘리는 노인에 기겁하던 아이들이, 휠체어도 밀고 책도 읽어드리며 ‘언젠가 우리 엄마도, 나도...'하며 자연스럽게 수긍한다. 얼마 전엔 요양보호사가 되겠다는 19세 아이의 응원편지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어머니께서는 딸을 일본 유학까지 보냈더니, 남의 똥이나 치운다고 싫어하신다고요(웃음)?

"네(웃음). 제 자존심을 박박 긁으시죠. 그런데 저도 고집이 세서 말 안들어요. 저는 저 한테만 잘 보이면 되거든요."

나는 나한테만 잘 보이면 된다니! 클린한 자기 선언이 한겨울 동치미처럼 귓바퀴에 쨍했다. 삶의 결정적 순간마다 몸사리지 않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해온 사람 특유의 단호함. 그렇게 문학의 변방에서 번역으로 단련되고, 생명의 변방에서 돌봄으로 수련된, 한 인간의 생각은 군더더기 없이 씩씩하고 슴슴했다.

다만 수많은 생면부지의 노인을 자상히 씻기고 먹였지만, 자신의 어머니만은 미지의 영역이라고.

"엄마는 개별성이 강한 분이에요. 얼마 전에 "이렇게 하는 거야"하며 살짝 화장실 케어 해드렸더니, "너 대충 해서 싫다"고 까탈을 부리세요(웃음). 그래도 제 출판기념회엔 지팡이 집고 꼿꼿이 와서 끝까지 계시다 혼자 마을버스 타고 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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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온기가 돌면 어떻게든 웃으며 살아요.”/사진=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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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죽음을 목격하는 일, 돌봄 노동의 최전선에 있는데... 이 일이 좋으세요? 무엇을 배웁니까?

"저는 자연스럽게 돌봄의 레일 위에 있었어요. 뭘 배우냐? 사랑이죠. 뮤즈에게 제우스에게 사랑을 드리면 저에게도 사랑을 주세요. ‘아파요'만 겨우 되뇌이시던 분이 주물러드리고 위로해드리면, ‘고맙다'고 ‘널 신뢰한다'고 눈으로 인사를 해요. 용문신 한 무서운 제우스도 면도할 때는 볼을 슬쩍 볼록하게 해서 도와주시고요. 그 분들은 셈이 없어요. 진심이죠. 어떤 제우스는 제가 밤새 옆 침대 분의 각혈을 닦고 퇴근하니 "너 고생많다"고 눈물을 쏟으세요."

-미래엔 AI가 노인들을 돌본다고도 해요. 상상이 되세요?

"거동이 가능하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혈압이나 당뇨도 재고 산책할 때 옷도 챙겨 식당도 안내하고, 젊을 때 좋아하던 언어를 입력해 놓으면 말동무도 되겠죠. 혹여 나쁜 인간에게 학대당하는 것보다 ‘지니'가 더 나을 수도 있고요(웃음)."

-힘들 때는 어떤 기도를 하나요?

"저는 늘 제 힘으로 먹고 살았어요(웃음). 혹 기도로 신께 받을 수 있다면 이상적인 학교, 최고의 요양원 그리고 저를 위해선 좋은 와인과 책을 받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생로병사를 겪으며 돌보고 돌봄 받는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AI가 아무리 똑똑해도 못하는 게 있어요. 인간미와 따스함은 기계화도 제도화도 안돼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도 엄마는 뒤숭숭하잖아요. 요양원도 비슷해요. 나의 부모는 나의 아이와 다르지 않아요. 감사하게도 아이도 노인도 의외로 잘들 견뎌내죠. 중요한 건 하나에요.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 그렇게 공간에 온기가 돌면 어떻게든 웃으며 살아요."

인터뷰하는 동안, 요양원 안의 노인들이 우리를 지나 느릿느릿 걸어다녔다. 손톱을 더 잘라달라고 떼를 쓰는 노인, 침착하게 어르는 요양보호사… 소란이 잦아들자 간식을 먹고 TV 앞에 모인 노인들의 시간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문득, 다가올 나의 시간이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시니 안심되시죠? 이곳에선 다 주인공이에요." 신들의 요양보호사가 미소지었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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