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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일사일언] '우아한 원시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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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백윤학 지휘자·영남대 교수


입시를 마친 학생들을 위해 고교 강당에서 해설이 있는 연주를 할 때다. 지루해할까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학생들은 한 곡, 한 곡 눈을 반짝이며 신기한 듯 집중해 들었다. 마지막 곡을 지휘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잠시 눈을 감으라 주문했다. 그러곤 지휘봉 대신 마이크를 들고 다음 곡을 설명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왼쪽 끝으로 걸어갔다. "이제 눈을 뜨세요." 저만치에서 손을 흔드는 지휘자를 보고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지휘대 위에서 떠드는 줄 알았던 지휘자가 예상과 다른 곳에 있어서 놀란 것이다. 마이크와 스피커를 이용한 일종의 '귀속임'이었다.

해설할 땐 마이크를 쓰지만 오케스트라 연주 땐 그러지 않는다. 보통 클래식은 전용 연주회장에서 마이크의 도움 없이 펼쳐진다. 성악가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넓은 오페라극장의 구석구석까지 잘 들리도록 음량을 키우고, 오케스트라 소리에 묻히지 않는 고유의 음색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오케스트라와 실내악의 경우 무대에서 연주자들이 듣는 음향과 청중이 듣는 음향이 다르므로 무대 리허설 때 누군가 객석에서 균형감 있게 들리는지 확인해야 한다. 반면 대중음악은 마이크와 음향 장비를 적절히 사용해 좀 더 다양한 음향을 들려줄 수 있다. 각 악기 간 음량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간단한 조작으로 가능하고, 스피커를 통해 더 큰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다. 카메라 수십 대가 동원된 중계방송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는 것과 경기장에서 직접 관람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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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학습한 기계가 바둑 고수를 이기는 최첨단 시대에 몇 세기 전 작곡된 곡을 매번 비슷한 환경에서 연주한다는 것이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한 가지는, 스피커를 거치지 않고 내 귀로 직접 들어오는 인간 소리의 감동은 신기술로 대체되지 않는다. 가상현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직접 가는 여행의 현장감을 넘어설 수 없는 법.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아직도 클래식 연주회장을 찾는 게 아닐까 싶다. 클래식 공연의 문턱은 높지 않다. 휴대폰 잠시 끄고 도심 속 '우아한 원시림'으로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백윤학 지휘자·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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