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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원고료 대신 정기구독권 드릴게요"…문예지의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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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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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된 A시인은 시 2편을 청탁한다는 이메일을 문예지 B사에서 최근 받았다.

정식 청탁서 대신 "옥고(玉稿)를 보내 달라"는 문구 아래에는 마감 일자 등 간략한 사항만 담겨 있었다. B사에 고료 여부를 문의하니 "우리는 아무에게나 원고를 받지 않는다. 아무 시나 게재하지도 않는다"면서 고료 대신 '책 한 권'을 보내주겠다는 답변이 도착했다. A시인은 "등단 초기이다 보니 신인들은 잘 모르고 원고를 보내는데, 창작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문예지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유명 문학상이 불합리한 계약 조항으로 파문을 일으킨 가운데 문학 출판사보다 상대적으로 을(乙) 위치에 놓인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들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터무니없는 고료를 감내해야 하거나, 고료 대신 정기구독을 강요받거나, 덜 유명하다는 이유로 고료를 차등 지급받는 사례가 다수여서다. '안정적인 작가를 확보하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데도 일부 문예지가 질 낮은 행동으로 창작자의 싹을 자르는 비상식적 악습을 반복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수 문예지의 상식 이하 고료는 고질적 문제다. 최근 C문학평론가는 D문예지에서 청탁서를 받으며 '평론 분량 50매, 소정의 고료'라는 문구를 확인했다. C씨는 "D사는 자주 읽어온 문예지였기에 신뢰했고, 고료가 많고 적음도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는데 통장에 입급된 고료를 확인하고는 입맛이 썼다"고 털어놨다. 입금된 비용은 10만원, 원고지 1매당 2000원꼴이었다. 통상적인 최소 고료인 5000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였다. C씨는 이후 겸연쩍더라도 청탁을 받으면 고료부터 확인한다.

정기구독 강요도 흔한 풍경이다. E시인은 신인 시절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F문예지에서 청탁을 받았다. 출간 직전 F문예지는 "현재 정기구독 명단에 없는데 약정된 고료만큼 문예지를 송부해 고료를 갈음해도 되겠느냐"고 설득했다. E시인은 "신인 처지에서 정말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어서 수락했다. 그런데 사석에서 물어보니 '신인 주제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건방지다'는 인식이 있고, 그렇기에 매년 신인 특집마다 벌어지는 상습적인 일이었다"며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정기구독을 '거절'하는 과정을 거쳐야 받을 수 있는 건 불합리하다"고 꼬집었다.

발행인 재량으로 고료를 차등 지급한다는 의심도 있다. G시인은 시전문지 H사에 원고를 보냈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고료가 책정돼 있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정이 어려우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추후 해당 문예지에서 다룬 기획에 대해 동료 문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황당한 이야기를 접했다. 당시 평론을 게재한 동료에게 H사가 고료를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G시인은 "출신 문예지나 인지도, 개인적 친분에 따라 누구는 고료를 주고 누구는 안 줘도 된다는 사고가 팽배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고 지적했다.

고료 입금이 지연되는 사례도 잦다. J출판사 매거진에 소설을 발표한 I씨는 두 계절이 지나도 입금 소식이 없었다. 문의하자 그제서야 고료 입금 절차가 진행됐다. 한 계절을 더 보냈다. "봄에 작품을 발표했는데 겨울에 입금됐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L문예지에서 운영하는 문학상에 당선된 K소설가는 상금은 500만원이지만 '뒤풀이 비용'을 부탁한다는 고지를 받았다. 수상자가 흔쾌히 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200만원을 '선(先)이자'처럼 떼이는 방식이었다. K씨는 "소득세를 제외하면 상금 중 절반만 받는 셈이다. 과거 한 선배는 뒤풀이 비용을 내기 싫어 본인 시상식 뒤풀이에 참석하지 않고 도망갔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진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담당 편집자가 퇴사했다는 이유로 연락이 두절되거나 후임 편집자한테서 '자기 업무가 아니다'란 이유로 고료를 받지 못했거나 출판사는 존속하지만 문예지 발간을 중단해 고료를 받지 못했다는 제보도 잇따랐다.

문예지 편집위원인 한 문학평론가는 "재정이 열악한 문예지들이 '문학의 명맥을 잇는다'는 이유로 창작자의 권리를 얕잡아보는 모습은 안 그래도 외면받는 문예지 위상만 낮추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문예지 주간을 맡았던 한 시인은 "문예지가 양질의 창작자를 잉태하고 공급받는 산파(産婆)라는 공감대 속에서 문예지 발간지원사업 활로를 현재보다 넓히거나 기업의 메세나 활동에 문예지도 포함하는 등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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