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9 (목)

[공감] 이번 생은 악운을 쏟아부은 팔자라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서울경제


엄마는 나에게 “너는 어떻게 팔자가 그렇니” 하신다. 내 팔자. 어려서는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암에 걸리고, 악운을 쏟아부은 팔자. 팔자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한편으로는 편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을 팔자라고 부른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나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 불행을 아이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 (···) 하루라도 행복해야 한다. 인생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지 말고 조각조각으로 나누면 팔자가 나빠도 행복한 순간이 많다. (김미희,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2019년 글항아리 펴냄)

김미희 작가의 약력 첫 줄은 이렇다. ‘친모와 헤어져 태어난 장소와 시간을 모른다.’ 그토록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만난 남편은 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슬픔과 절망 모두 사치’다. 비명을 지르는 남편의 방 너머에는 어린 아들이 잠들어 있다. 이 책은 남편의 암 투병 속에서 삶을 더 절실하게 움켜잡아야 했던 한 어머니·아내·여성의 이야기이다. 아들은 갓 삶을 꽃피우려는데 남편은 자꾸만 죽음 쪽으로 다가간다. 마음은 무너지는데 몸을 일으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김 작가는 비록 불운했을지라도 늘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마지막 날들을 온 힘을 다해 살아낸다. ‘오늘 안에 택배를 모두 배달해야 하는 택배기사처럼. 할당 물량을 맞춰야 퇴근할 수 있는 미싱사처럼. 쌀통에 한 그릇의 쌀만 남은 것처럼.’ 남편의 참혹한 신음과 아이가 쫑알대는 소리가 교차하는 김 작가의 기록에 뜻밖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아들과 남편이 함께 웃던 날, 그녀는 행복했다. 팔자란 지독하게 모질고 무거워서 바꿀 수도 내던질 수도 없지만, 하루는 액체처럼 우리가 어떤 ‘용기’에 담느냐에 따라 조금 달라진다. 그러니 타고난 팔자가 무겁고 버거울 때는 하루씩 쪼개어 살 일이다. 딱 하루씩만 행복해져야겠다.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서울경제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