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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낙방거사 보듬은 ‘여걸 시인’ 김삼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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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의 앞선 여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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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은 양반이지만 비복 하나 없이 직접 농사짓고 길쌈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호남의 한 촌부, 김삼의당(1769~1823). 어릴 때부터 독서를 하여 지식이 풍부한데다 문재 또한 뛰어나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시가 되었다.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엔 과거 급제만 한 것이 없지만 여자로서는 언감생심. 18살에 집안의 주선으로 한 동네 사는 총각 하립(1769~1830)과 혼례를 올린다. 연산군대 학자 김일손의 후손 신부 김씨와 세종대 영의정 하연의 12대손 신랑 하씨, 공교롭게도 이들은 태어난 해와 달과 날이 같았다. 서로를 알아본 듯 첫날밤부터 주거니 받거니 시로써 대면식을 치른다. 신랑이 “만나고 보니 둘은 광한루의 신선들, 이 밤은 분명 옛 인연의 이음이리니”라고 하자, 신부는 “열여덟 살 신선 열여덟 살 선녀, 이 밤의 만남이 어찌 우연이리오” 한다.

결혼으로 인해 꿈에 그리던 과거 급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남편이 합격만 하면 자신은 물론 조상과 후손, 온 집안이 다시 영광스러울 것이다. 갓 식을 올린 신랑 하립은 신부의 원대한 구상에 떠밀려 집을 나선다. 가까운 산사로 들어가 수년을 고군분투하다가 다시 서울로 옮겨 본격적인 수험생활에 들어갔다. 낙방을 거듭하며 기간이 길어지자 가난한 아내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녀를 팔아 뒷바라지한다. 남편에게 연일 시를 띄워 “가난한 집에도 위대한 인재 많더라”거나 “언제나 고향 마을 빛내실까”라며 수험생을 압박한다. 계속되는 낙방에 의기소침해진 남편, 모든 걸 접고 낙향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내 삼의당은 의(義)로써 정(情)을 누르라 하고, “부모님을 영화롭게 하고 아내를 즐겁게 해 줄 그것도 못해 주냐”고 한다. 이런 아내의 권고에 남편은 “꾸지람이 깊고 말이 절실하다”고 썼다. 하립은 결국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낙향으로 가닥을 잡자 삼의당의 꿈도 물거품이 된다. 그런데 담대하다.

남편이 “구구하게 세상의 욕심 어찌 다 채우리오? 이 한 몸 편하니 신선이 따로 없소”라고 하자, 아내는 “서울서 십년을 분주했던 나그네, 오늘은 초당에 신선처럼 앉으셨네”라고 한다. 누구의 뜻인지, 하립은 그 후로도 10년 더해 40이 되도록 과거 시험장을 오르내렸다. 한 선비의 등과를 위해 남아날 게 없었던 살림, 부부는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해 뜨면 일하고 해지면 쉬면서(日出作日入息), 먹기 위해 일을 하는(飽食在勤苦) 생활이었다. 긴 이랑 다 매면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참을 이고 오고, 배불리 먹고는 절로 노래가 나오는 삶. 극한 노동에서도 샘솟듯 흘러나오는 시심(詩心)을 주체할 수 없었다. 특히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연작시 <십이월사>(十二月詞)는 18세기 호남의 들녘과 풍속을 살아 꿈틀거리게 한 수작이다.

자신을 옭아매었던 세상의 욕망에서 풀려나 안분자족의 삶으로 돌아선 부부는 일상을 노래하는 시인이자 철학자가 되었다. 셋째 딸이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자, “죽고 사는 것은 누구나 한 번 겪는 일이고, 장수와 요절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며 자신들을 위로한다. 나아가 삶은 기쁨이고 죽음은 슬픔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자고 한다.

삼의당은 여성으로는 많은 양인 270여 편의 시문을 남겼다. 스스로 말하기를, 큰 공부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여러 책들을 읽었고, 보고 겪은 것들을 마음 가는 대로 썼을 뿐이라고 한다. 사회적 욕망이 강했던 삼의당, 그 꿈을 남편을 거치지 않고는 성취할 수 없었던 시대가 안타까울 뿐이다. 쇠락한 가문을 세우고자 적성에 없는 과시(科試)에 청춘을 사른 가난한 선비도 마찬가지다. 삼천 가지 예(禮) 중에 남녀 구분이 가장 많다던 삼의당, 뜻은 원대하나 도구를 갖지 못한 폐단이 있었다. 실패 이후를 어떻게 살 것인가. 삼의당 부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남편은 아내가 거처하는 집 벽에 멋진 글씨와 그림을 붙이고 뜰에는 꽃을 가득 심어 놓고, 그 집을 ‘삼의당’(三宜堂)이라 불렀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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