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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일본의 한국 전문가 “일 식민지배 책임성 부인 뒤에 미국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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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현대 한일문제의 기원: 한일회담과 ‘전후 한일관계’

요시자와 후미토시 지음, 이현주 옮김/일조각·3만5000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해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 일본이 복귀한 국제사회는 미국과 소련이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하는 ‘냉전의 전장’이었다. 이에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 자본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냉전에 ‘참전’하게 되었으며, 한반도는 그야말로 동북아시아 냉전의 최전선으로 긴장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 니가타국제정보대학 국제학부 교수(한국현대사, 한일관계사)인 요시자와 후미토시가 쓴 <현대 한일문제의 기원: 한일회담과 ‘전후 한일관계’>는 냉전으로 양분된 세계에서 일본이 어떻게 발언권을 얻게 됐으며, 제대로 된 식민 지배 청산의 기회를 놓쳤는지를 고찰한다. “미국 및 연합국은 (사회주의 진영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의 전후 부흥을 우선시하여 대일배상을 가능한 한 경감하는 방침을 취했다. (이) 때문에 극동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남한은 재조일본인 재산의 취득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 한국 정부는 일본에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연합국 자격을 취득하려 시도했으나 특히 일본과 영국의 반대 때문에 실현할 수 없었다.”

일본은 이때부터 식민지 지배는 당시 국제법상 합법이고 정당하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변함없다. 결국 태평양전쟁 연합국 가운데 자본주의 진영이 식민지 지배 책임성을 부인하는 일본을 추인한 결과, 그 여파가 오늘의 불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하위 항목으로 1965년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미국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미국은 주한대사와 주일대사를 통해 한국에 ‘청구권’이라는 명목을 포기할 것을 촉구하고 일본에는 한국에 대한 경제 진출 의욕을 자극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은 확실히 ‘경제 기조’에 의해 청구권 문제를 타결하도록 촉진하는 것이었다.” 경제 기조에 의한 한일회담 타결이란 한일 간에 놓여 있던 중요한 문제(식민지배 인정이나 청구권 문제)를 경제적 수단으로 얼버무리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미국과 일본의 인정 및 경제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고, 미국과 일본 또한 냉전 체제에서 한일문제를 시급하게 덮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성급한 타결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 기회가 사라졌다고 지은이는 결론 내린다. 한국에서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더해 일본에서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자세히 소개한 점도 눈에 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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