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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김효진의 책 한 끼]'늑대들'의 놀이터, 핀란드·에스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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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의 늑대/김영록 지음/쌤앤파커스/1만6000원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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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성공은 노키아의 폐허에서 피어났다." 스타트업 생태학자이자 재단법인 넥스트챌린지 대표인 저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노키아가 2011년 핀란드 경제에 미친 영향은 말 그대로 막대하다. 국내총생산(GDP)의 4%를 책임지고 수출의 25%를 짊어졌다. 2013년 노키아가 망하자 핀란드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0.76%로 곤두박질쳤다. 노키아의 빈자리는 청년 창업가가 이끄는 스타트업들이 메웠다.


핀란드 인구는 겨우 550만명인데 해마다 40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새로 생긴다. '앵그리버드', '클래시 오브 클랜'으로 유명한 로비오와 수퍼셀, 온라인 음악 스트리밍 기업 스포티파이 등이 핀란드에서 태어났다.


2017년 핀란드의 스타트업 투자금은 3억4900만유로(약 4508억7310만원)로 2012년 대비 100% 넘게 늘었다. 크고 작은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하고 학계와 실무 연계를 대폭 확대한 정부의 노력이 주효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핀란드를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꼽는다.


이웃 에스토니아는 국토가 우리의 절반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절반이 산림지대다. 1990년대 초반 국민 1인당 GDP가 2000달러(약 230만원)에 불과했을 정도로 힘들게 살아온 나라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에스토니아의 GDP가 2018년 1만9000달러로 늘었을까. 연간 2000개씩 생기는 스타트업이 고성장의 바탕이다.


많은 이들이 에스토니아는 몰라도 세계 1위 인터넷전화 기업 스카이프는 알고 있다. 세계 최대 국제송금 기업 트랜스퍼와이즈, 세계 최초 식음료 배달로봇 기업 스타십테크놀로지도 고향이 에스토니아다.


에스토니아의 규제 개혁은 과감하다 못해 대담하고 전면적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회사에 재투자하거나 은행에 넣어두면 법인세가 제로다. 특유의 전자영주권 제도 덕에 100유로만 내면 누구든 에스토니아 영주권을 받아 발 한 번 들이지 않고도 에스토니아에서 창업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에서 문을 연 외국 법인은 현재 5000개다.


2006년 569만유로였던 에스토니아의 스타트업 투자금은 10년 만에 20배로 증가했다. "에스토니아를 보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어디까지 혁신이 가능한가?' 그들의 대답은 아마도 '혁신할 수 없을 때까지 혁신한다'일 것이다."


저자의 눈에 세상은 '패러다임의 전쟁터'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람이 패권을 쥔다는 뜻이다. 세계 곳곳에서 패러다임 전환으로 거대자본 없이 시장을 장악한 이들이 있다. 저자는 이들을 '촉과 야성으로 무장한 변종의 늑대'라고 부른다.


다종다양한 생명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5억4000만년 전, 다시 말해 '캄브리안 모먼트' 이전까지 생명체라곤 단세포, 플랑크톤, 박테리아 정도였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소규모 스타트업이 대거 등장해 세계경제의 틀을 뒤흔드는 오늘이야말로 캄브리안 모먼트라고 표현했다.


여기에 살을 보태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변종의 늑대들이 활보하기 시작한 현대판 캄브리안 모먼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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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와 에스토니아는 규제 철폐라는 분모를 공유한다. 규제 완화의 필요성과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미국의 원격의료 스타트업 텔라닥이다. 텔라닥은 '디지털 헬스케어의 우버'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2015년 상장한 뒤 기업가치는 4조원까지 치솟았다.


저자는 "(우리나라였다면 텔라닥은) 불법 의료를 했기 때문에 회사 경영자는 수사를 받아야 하며 회사의 경영은 당장 멈춰져야" 했을 것이라면서 "'매뉴얼이 없으면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던 일본마저도 과감하게 규제를 풀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우리나라는 매우 더디다. 실제 현장에서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느끼는 규제의 수준은 매우 답답한 지경"이라고 토로한다. 저자는 그러면서 어느 스타트업 대표가 'ABF in Seoul 2018' 미디어컨퍼런스에서 쏟아낸 말을 들려줬다.


"블록체인 사업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변호사와 법률 검토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100개 중 90개를 하지 말아야 한단다. 공무원들에게 제재를 받은 것도 수 없이 많다. 해서는 안 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들었다."


법무법인 린(테크앤로 부문)이 조사ㆍ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현재 글로벌 누적 투자 상위 100대 스타트업 가운데 30%는 한국에서 사업할 수 없다. 13개는 제한적으로 사업할 수 있을 뿐이다.


"에스토니아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한마디로 '발상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전제' 자체를 무너뜨려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뚫고 나갔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사고방식은 가히 이러한 대전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발상의 대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매우 기이한 현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전혀 혁신적이지 않은 정부'가 '매우 혁신적인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육성한다는 아이러니다."


저자는 규제와 간섭이 심한 우리나라 현실의 원인으로 정부주도 발전의 경험을 꼽았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특정 대기업을 밀어주고 과감하게 지원해 전체 경제의 성장이라는 성과도 맛봤다. 이 맛에 '정부가 무엇인가를 주도하겠다'는 문화가 깔려 있다는 얘기다.


다른 원인은 스타트업 분야에 대한 공무원들의 지식 부족이다.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공무원 순환근무의 특성상 일이 손에 익어 알아갈 즈음 해당 업무 영역을 떠나야 한다. 저자는 "그들이 공부를 게을리 한다거나 일에 대한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라면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새로운 방법을 내놓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이어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이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같은 스타트업 선진국들의 공통점이라며 "사냥감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늑대와 함께 나아가려면 늑대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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