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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태석이는 고통도 은총으로 여겼죠 뒷북이지만 빚 갚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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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돈규기자의 2사만루]

선종 10주기 기념사업위원장 안정효 인제대 의대 81학번 동기

“지난주엔 나환우들이 있는 마을에 다녀왔어. 한 달치 약과 함께 강냉이와 식용유도 나누어 주는데, 이것 때문에 나환자이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이 있단다. 한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왔길래 검진해보니 나병(한센병)이 아니더구나. ‘축하합니다!’라고 했지. 그런데 모녀의 눈이 기쁨 대신 실망으로 가득 차는 거야. 빈손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안쓰러워 살짝 불러 강냉이와 식용유를 주어 보냈다.”

고(故) 이태석(1962~2010) 신부가 2002년 3월 남수단 톤즈에서 보낸 편지다. 수신인은 안정효. 인제대 의대 81학번 동기다. 지난 6일 강원도 춘천에서 만난 안정효(58)씨는 "남수단에서 온 이메일을 전부 복사해두었다"며 종이 뭉치부터 꺼냈다. 그 편지들은 "안녕 정효야!"로 시작해 은행 계좌 번호로 끝나곤 했다. 안씨는 "나도 힘든 시기라서 도와주질 못했다"며 "의대 동문 사이트에 그 편지를 올리자 의사회가 관심을 갖고 KBS가 현장을 취재하면서 태석이가 세상으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천주교 사제가 된 이태석 신부는 2001년 아프리카 남수단 시골 마을 톤즈에 도착했다. 오랜 전쟁과 가난으로 환자가 지천이었다. 그는 깨끗한 물조차 없는 상처투성이 땅에 병원부터 지었다. 폐허가 된 학교 건물에 다시 벽을 쌓고 지붕을 얹고 창문을 달았다. 사제이자 의사, 교육자로서 환자를 돌보며 아이들을 가르쳤고 사랑을 전했다. 헌신적 봉사 활동이 국내에 알려지자 큰 반향이 일었다. 이태석 신부는 상처받은 아이들을 치유하면서 정작 자기 몸은 돌보지 못했다. 2010년 1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흔여덟 살이었다.

지난 14일은 이태석 신부 선종(善終) 10주기. 종교 다큐멘터리 흥행 기록(44만 관객)을 쓴 영화 '울지 마 톤즈'의 속편도 개봉했다. 광주광역시 살레시오 중·고교 성당에서 올린 10주기 추모 미사에는 전국에서 약 500명이 모였다. 선종 10주기 기념사업위원장을 맡은 안씨는 "이태석 신부를 향한 감정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 있다"고 했다. 2003년 3월 받았다는 편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곳은 무지 덥다. 한낮에는 50도까지 치솟아. 얼음 두 조각 띄운 찬물 한 컵이 그리울 때가 많다.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르치려고 이 먼 곳까지 오게 하신 것 같다. 방송사 취재에 응할지 망설여지지만, 풍족하게 살아가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그곳(한국)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조선일보

춘천 안정효내과의원에서 만난 안정효 원장.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을 지냈고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 기념사업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며 “상황이나 욕심 때문에 덮고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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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하고 무뚝뚝한 친구

―의대생 이태석은 어떤 친구였나요.

"재학 중에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습니다. 태석이는 과묵했고 실내 합주단이라는 동아리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점심 때는 농구하며 땀 흘리는 모습을 종종 봤고요. 저는 술 마시고 노는 축이라 섞일 일이 별로 없었지요."

―기억나는 일화라면.

"제가 대학 다닐 때 천주교 세례를 받았어요. 어느 날 저녁 미사 다녀오는 길에 화장실에서 마주쳤지요. 흥얼거리는 성가를 들었는지 '너 성당 다니냐?' 태석이가 물었어요. 최근에 세례 받았다고 하니 그냥 가버리는 겁니다(웃음). 반갑다고 해야 보통일 텐데. 동기들에겐 상냥하지 않았어요."

―우스갯소리를 잘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이들 앞에서나 그랬지 형이나 친구한테는 무뚝뚝했어요. 태석이가 10남매 중 아홉째인데 친동생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아버지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뒷바라지해 의대에 보냈잖아요. 집안의 자랑이었겠지요."

이태석은 평생 어머니 속을 두 번 썩였다. 없는 집에서 의사 덕 좀 보나 했는데 신학교에 가서 한 번, 신부가 되더니 아프리카로 떠나서 또 한 번. '울지 마 톤즈2'에서 어머니는 이렇게 술회했다.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불쌍한 사람 도울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에 가나. 하지만 자식이 나쁜 길로 빠져도 막지 못하는 게 부모인데, 좋은 일 하겠다는 걸 어떻게 막나요."

―톤즈 가기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살레시오 수도회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 1997년쯤부터 이메일을 주고받았어요. 태석이가 이탈리아에서 유학 중이던 2000년 여름에 로마로 여행 갔다가 만났지요. 졸업하고 13년 만이라 새까맣게 변한 친구를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남수단에 선교사로 자원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왜 남수단에 꽂혔나요.

"1999년에 선교 체험으로 방문했다가 매료됐다고 했어요. 환자에게 약을 주면서 '하루 3번 식후에 복용하라'고 했는데 못 알아듣더랍니다. 하루에 겨우 한 끼 먹는 형편이었으니까요. 무슨 콩깍지가 씌었는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그 나라로 가 평생 살겠다고 했어요."

―2001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12월 기어코 남수단으로 들어갔는데.

"처음 2년 동안은 이메일을 자주 보내왔어요. 어려운 시기였겠지요. '그래 힘들겠다. 돕지 못해 미안하다'고 답장했습니다. 저도 병원이 망해 곤경에 빠져 있었지만 그때 도와주지 못한 걸 후회해요. 방송으로 알려지고 후원자가 많아지면서 연락이 뜸해졌습니다."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2015 ~2018년)을 지냈고 10주기 기념사업위원장도 맡았으니 마음의 빚을 갚은 것 아닌지요.

"아휴, 그건 평생 못 갚아요. 살아 있을 때 못 하고 뒷북 치는 꼴이지요."

―2001년으로 돌아가서 '톤즈로 떠난다'며 이태석 신부가 찾아온다면 말릴 건가요.

"가서 잘해라 그러겠지요 뭐. 하하하. ('두 분 다 경상도 남자가 맞는군요' 하자) 그 고집 못 꺾어요. 혼자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잖아요. 편한 의사 생활도 포기하고 수도회 신부가 됐으니까요."

조선일보

(사진 위)영화 ‘울지마 톤즈2’에 나온 이태석 신부와 남수단 톤즈 아이들. (아래)지난 12일 전남 담양에 있는 이태석 신부 묘소를 참배한 안정효씨와 인제대 의대 졸업생들. 흑인은 톤즈 출신 유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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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나아서 톤즈로 돌아가겠다"

이태석 신부에게 아프리카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은 풍토병이었다. 말라리아에 걸려 일주일간 토하고 고생하자 백광현 신부 등 서품 동기들이 "넌 이제 틀렸다. 수단은 물 건너갔다"고 놀렸다. 이태석 신부는 끄떡없었다. "수단 사람들이 앓는 말라리아를 앓았으니 이제 나는 그들과 같아졌다"며 달가워했다.

―아내가 귀여우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지요.

"저는 2010년부터 수단어린이장학회에 관여했는데 그해 여름 톤즈에 가보았어요. 이태석 신부를 잃은 병원에 새로운 의사를 파견하려면 현지 사정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열악했어요. 구멍난 벽돌을 덧대 만든 숙소는 한증막이나 다름없었지요."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한 사람이 평생 할 일을 8년 만에 다 했더라고요. 수십㎞를 걸어온 환자들(하루 약 150명)을 치료하고 돌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았어요. 아이들 가르치고 다른 일도 보면서 저녁이면 녹초가 되는 겁니다. '빨리 잘 죽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35인조 브라스밴드도 이끌었지요.

"부산 송도 판자촌에 살던 어린 시절 태석이에게 음악은 위로이자 놀이였어요. 풍금을 치고 싶어 매일 송도성당에 갔대요. 톤즈 아이들에게도 악기를 가르쳤지요. 전쟁과 가난이 준 상처를 음악으로 어루만지고 희망을 되찾아주고 싶었답니다. 멋진 단복을 입은 아이들에겐 '톤즈의 브라스밴드'라는 자부심이 생겼지요. 태석이가 아이들을 참 좋아했어요. "

―그런데 왜 사제의 길로 갔을까요.

"자기 애가 있으면 남의 애를 좋아하기 어려워요. 시야가 좁아지고 좁쌀처럼 살게 되거든요. 역설적이지만 자식이 없으니 그렇게 많은 자식을 얻은 겁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청소년을 가르치고 같이 놀고 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게 핵심인 수도회예요."

―이 신부 자서전을 보니 한센병 환자들을 각별히 여긴 것 같습니다.

"어느 부활절에 그들에게 선물하고 싶어 하얀 종이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발바닥 모양을 떠 맞춤 신발을 만들어주었대요. 발 형태가 너무 괴상해서 마음이 아팠다고 편지에 적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손발의 감각을 잃었지만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고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고. 육체적으로 문드러지고 사회적으로 버림받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유하다고."

―한국은 없는 것이 없고 톤즈는 있는 것이 없는 곳으로만 알았는데.

"이태석 신부는 '물질이 풍요한 곳에서는 남보다 조금 더 가지고 더 위로 올라감으로써 행복해지려 하지만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했어요. 행복이란 작은 일에 감사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겠지요."

―2008년 말 귀국했다가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도 내시경을 하면서 대장암을 종종 발견해요. 태석이도 괜찮겠거니 했는데 간에 전이된 상태였어요. 말기라 수술도 불가능했습니다. 항암 치료 시작하면서 평생 가장 자주 만났지요."

―고통스러운 티를 안 냈다면서요.

"병원 밖에서나 그랬지 안에서는 냈어요. 신부도 사람이니까요. 저는 의사이고 '괜찮다' '나을 거다'라는 빈말도 못 하는 성격입니다. 병문안 가서 '힘들제?' 물어보는 게 다였어요. 집을 떠나 온 사람처럼 '빨리 나아서 톤즈 가야 한다'는 말만 계속했어요. 못 갈 걸 아니까 저는 아무 말도 안 나오더라고요."

조선일보

안정효씨가 친구 이태석 신부가 남긴 정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순수한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 사람”이라고 했다.


마지막에 들려준 농담

2009년 12월 17일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 시상식.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외출이었다. 진통제를 맞고 참석해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안씨는 그날 촬영한 영상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수상 소감을 남겼나요.

"수상자 발표 때 기자들이 소감을 물었는데 '외람된 말이지만 쪽팔린다고 했다'며 웃었어요. 창피했대요. 전문의도 아니고 특별한 백신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불치 환자를 고친 것도 아니니까. 내세울 것 없는 자그마한 의술로 병원이 없는 곳에서 원주민들과 몇 년 지낸 것뿐인데, 훌륭한 분들이 받을 상을 훔쳤다는 생각에 죄책감마저 들었다고 말했어요."

―그 자리에서 농담을 했다면서요.

"난센스 퀴즈를 냈어요. '우리 민족 가요 아리랑, 아리랑의 어머니 이름을 아십니까?'라고 물었지요. 답이 없자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아라리잖아요. 왜냐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하고 흥얼거렸습니다. 하하하. 박수가 터져 나왔지요."

―유언으로 알려진 'Everything is good'은 무슨 뜻인가요.

"내가 없어도 다 잘될 거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겠지요. 가톨릭에서는 입관하고 장례식까지 관을 열어둡니다. 이태석 신부가 누운 관 앞에서 제가 물었어요. 태석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니?"

―답을 들었나요.

"무슨 말을 하겠어요. 제가 태석이라면 이렇게 답했을 거예요. 정효야, 네가 알아서 해라(웃음)."

―선종 이후 가장 달라진 것은.

"수단어린이장학회에 들어오는 후원금이 연간 5000만원에서 2010년엔 20억원으로 늘었어요. 돈이 모이면 시끄러워지고 흔들릴 수 있다고 걱정할 정도였지요. 이태석 신부를 향한 사회적 반향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수도회가 판단하는 데 무척 오래 걸렸습니다."

수단어린이장학회는 이태석 신부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을 2007년부터 재정적으로 도와왔다. 그동안 후원자들(가톨릭 신자가 80%)이 기부한 돈은 123억원. 톤즈를 비롯해 세계 22국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직업훈련소에 지원하고 있다. 장학회 도움으로 톤즈에서 유학 온 3명 중 2명은 의대를 졸업했다. 안씨는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를 진료하는 '예리코 클리닉'에서 10년 넘게 봉사 활동을 해왔다.

―10주기 기념사업위원회는 어떤 일을 하나요.

"이태석 신부가 덜 잊히게 하는 게 제 임무예요. 이 신부가 남긴 사랑과 발자취를 조명합니다. 10주기 추모 미사가 제일 중요해요. 김수환 추기경 전기를 쓴 이충렬 작가에게 전기 집필을 요청했고 새로운 다큐 영화도 준비 중입니다. 우리가 당장 톤즈로 가서 봉사할 순 없잖아요. 저마다 욕심을 줄이고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이태석 정신을 잇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은 못 받더라도 욕은 먹지 말아야죠."

―이 신부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라면.

"한국 사회의 모습과는 정반대라서 센세이션을 일으키지 않았나 저는 생각해요. 우리가 맞는다고 믿은 게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삶이었습니다. 저 같은 보통 사람은 물론 성직자에게도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남겼지요. 우리 곁에 있는 성직자가 마땅히 잘했다면 멀리 남수단까지 가서 이태석 신부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직업윤리를 저버리고 돈벌이를 앞세우는 의사도 사실 많아요."

―평일에 죄 짓고 주말에 종교 시설에서 씻는다는 사람이 많은데.

"저도 고해성사를 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안 하겠습니다'를 되풀이해요(웃음). 어느 신부님이 그랬대요. '아휴, 사는 게 다 죄예요!' 하하하."

지난 12일 선종 10주기 미사에 참석했다가 춘천으로 돌아가는 안씨와 통화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이었다. 그는 “요즘 다들 정의를 부르짖는데, 사랑과 평화 없는 정의는 폭력과 같다”며 “태석이를 기억하면서 오늘 마음에 새긴 말”이라고 했다.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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