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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아침을 열며]겨울은 나를 돌아보기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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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 기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얻은 교훈 중 하나가 이렇게 하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수많은 대내외 요인이 복잡다단하게 결합돼 움직이는 것이 경제인데, 몇몇 정책으로 살리고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 나라의 경제는 정부의 정책보다 때로는 통제할 수 없는 운(運)에 더 크게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더더욱 이럴 가능성이 높다. 실제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엔 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3저호황’이라는 외부의 행운 덕에 고도성장을 한 반면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외부의 악운으로 고꾸라진 경험이 있다.

경향신문

‘행운의 보수(pay for luck)’라는 경제학 이론이 비슷한 얘기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보수(연봉)를 실증적으로 분석해 보니 CEO의 경영 능력(한계생산성 증가)이 아니라 경기 호황, 우호적인 원자재·환율 상황 등 외부의 행운으로 기업 실적이 급등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는 이론이다. 사장님의 연봉이 경영 능력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경제의 성과도 정부의 정책만으로 좌우되진 않는다. 이런데 과연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렇게 하면 집값을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의 얘기도 신뢰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최근 서울 등의 아파트값이 크게 뛰면서 집값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도 곳곳에서 나온다. 부동산 정책을 책임지는 정부는 지난해 말 고가주택과 다주택자의 종합부동산세 인상과 대출 규제 강화, 분양가상한제 적용 지역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12·16 부동산대책’을 내놓았다. 이에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알맹이 없는 대책이라 비판하며 분양가상한제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공시지가를 두 배로 올려 종부세 등 보유세를 대폭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얼마 전 내놓은 ‘4·15 총선 주택공약’에서 집값을 잡으려면 규제를 풀고 주택공급을 늘려야 한다며 재건축·재개발과 대출 규제를 완화하고, 분양가상한제는 폐지하고, 보유세 부담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 다 현 정부 정책이 집값 급등을 불러왔다고 비난하는 데는 한목소리인데 제시하는 집값 안정 해법의 방향은 그야말로 정반대로 갈린다. 누구를 믿어야 할까. 과연 집값을 잡겠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어떤 정책이든 부작용은 있기 마련이다. 경실련 요구대로 분양가상한제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보유세를 몇 배로 올리면 부동산 경기 침체와 조세저항이 따를 우려가 있다. 한국당 주장처럼 재건축과 대출 규제를 풀어주고 세금까지 낮추면 투기열풍과 가계부채 급증 등의 우려가 있다. 그래서 정책에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하는 묘수가 필요한데, 정답을 찾는 게 정말 어렵다. 자기 정책만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단정하는 이들을 믿기 힘든 이유다.

집값 상승의 원인도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는데 가장 큰 원인은 저금리와 경기 부진으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시중의 넘치는 유동성(돈)이 주택시장으로 몰리기 때문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이견이 크지 않다. 박근혜 정부 시절 재건축·재개발, 대출 규제 등을 대거 푼 이른바 ‘빚내서 집 사라’ 정책의 후유증, 장기 임대사업자에게 세제혜택을 주는 현 정부의 임대주택등록활성화로 인한 매물 잠김 현상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딴 데는 몰라도 우리 집값은 올라야 한다는 한국 중상류층의 이기심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어느 한쪽에 몽땅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어느 한쪽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경기부양책이 현 정부 들어와서 집값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점만 강조한다. 한국당은 현 정부의 규제 정책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는 비난 일변도다. 어느 쪽도 자기반성은 없다. 집 없는 사람들이 왜 아직도 집을 사지 못했는지 반성해야 할 판이다.

자기 성찰이 없는 남에 대한 비판만큼 참고 듣기 어려운 소리도 없다. 겨울이 깊어가는 지금. 찬바람에 몸이 움츠려 든 김에 나를 돌아보기도 좋은 시간이다. 남을 비난하는 목청을 높이기 전에 찰나만이라도 나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져보자. 20세기 시인 기형도는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램프와 빵ㅡ겨울 版畵 6)라고 했다.

김준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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