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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공감세상] 대한민국 피디가 강연하는 법 / 김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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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민식 ㅣ <문화방송>(MBC) 드라마 피디

강연을 듣는 걸 좋아한다. ‘저 사람이 수십년을 전문가로 살아왔는데, 자신이 깨달은 바를 딱 2시간 동안 대중에게 전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배움에 있어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다. 틈만 나면 도서관 저자 강연이나 전문가 특강을 쫓아다닌다.

강연을 자꾸 듣다 보면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런데 불러주는 곳이 없다. 이럴 땐 돈을 안 주는 곳을 가면 된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처음부터 돈을 받으려고 하면 기회가 안 온다. 잘하려면 자꾸 해봐야 하고, 빈도를 높이려면 기준을 낮춰야 한다. 예산을 따지지 않으면 기회가 온다.

중고등학교 학사 일정 중에 ‘직업인의 날’ 행사가 있다. 학부모 가운데 의사, 변호사, 공무원 등 아이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와서 직업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이다. 연예인을 꿈꾸는 아이도 많은데, 막상 연예인은 섭외하기 힘드니 대신 방송사 피디를 부른다. 학부모들이 재능기부로 하는 행사라 돈은 안 준다.

어느 시골 고등학교에 가니 학생이 질문을 하더라. “그래서 아저씨가 김태호나 나영석보다 더 잘나가는 피디인가요?” 아이들은 이렇게 뼈를 때리는 질문을 한다. 유명한 피디가 오는 줄 알고 기대했다가 실망했나 보다. “아닙니다. 저보다 김태호나 나영석이 훨씬 더 잘나가지요. 그런데요. 그분들은 너무 잘나가서 이런 학교 행사에 일일이 다닐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나 오지요. 피디가 좋은 게요. 잘나가지 않아도 피디는 피디예요. 앞으로는 방송사 피디가 아니라도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어요. 집에서 유튜브를 만들어도 피디거든요. 스타 피디가 되어야만 행복한 건 아닙니다. 유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좋아하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어요. 욕심을 줄이면 되거든요.” 그러니 너도 욕심을 좀 줄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는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거지만.

교수와 전문가들 강연을 듣다 보면 의외로 재미없는 강연도 있다. 남들 강연을 재미삼아 들어본 적이 없는 탓이다. 교수는 학술회의장에서 다른 교수들 발표만 들었기에 다들 그렇게 재미없는 강연만 하는 줄 안다. 전문가란 대개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재미난 일에 사람들이 관심이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말하는 사람의 재미만 생각하지, 듣는 사람의 재미를 고려하지 않는다. 강연을 잘하려면, 다른 사람의 강연을 자꾸 들어봐야 한다. 일삼아, 공부삼아 들을 게 아니라 재미삼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재미로 강연을 들으러 오는 청중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강연 끝에는 질의응답 시간도 넣는 게 좋다. ‘내가 수십년 동안 배운 지식을 겨우 2시간 동안 어떻게 다 해?’ 주어진 시간을 넘겨 주야장천 자기 말만 하고 가면 안 된다. 공부는 상호작용이다. 들은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줘야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2시간이라면 나는 강연을 1시간, 질의응답을 1시간 한다. 청중의 질문을 통해 대중의 관심사나 궁금한 점을 배운다. 배우지 않으면 성장이 없다. 늘 같은 얘기만 반복하게 된다.

강연을 잘하려면 양극단의 태도가 필요하다. 겸손과 ‘자뻑’. 어떤 사람에게든 배우겠다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경청할 수 있다. 겸손하기만 하면 강연을 하지는 못한다. 누가 강연 요청을 해도 “어휴, 저 같은 사람한테 뭐 들을 얘기가 있다고” 하고 손사래를 친다. ‘내가 이것 하나만큼은 참 잘했어. 그래서 이건 꼭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이런 자부심이 있어야 무대에 설 수 있다.

강연에서 중요한 건 의미보다 재미다. 아무리 의미 있는 얘기라도 재미가 없으면 듣지를 않고, 사람들이 경청하지 않는 강연은 의미가 없다. 재미있게 할 자신이 없다면, 그냥 짧게 해라. 대부분의 강연자들이 말을 길게 하다 망한다. 어린 시절 교장 선생님 훈화를 기억하라. 훌륭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욕심에 말을 오래 하니 아무도 안 듣는다. 짧게만 해도 본전은 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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