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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10·26 그날의 총성…김재규 몰입 연기한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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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40일간 권력암투 중정부장역

머리카락 매만지는 습관까지 연구

“정치 잘 모르지만 인간 갈등에 흥미”

중앙일보

22일 개봉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사진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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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난 어린애였고 TV에서 대통령 사진이 계속 나왔죠. 길에선 소복 입은 할머니들이 통곡하고…. ‘나라에 뭔가 큰일이 생겼구나’ 했던 기억이 나요.”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의 총성은 배우 이병헌(50)에게 흑백 뉴스 이미지로 남아있다. 41년 뒤 스크린에서 그는 시바스 리갈 위스키 병을 앞에 둔 18년 장기 집권 대통령을 독일제 권총으로 쏜다. “혁명의 배신자로 처단한다”는 말과 함께.

22일 개봉하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이 1인자 ‘박통’(이성민)에게 총구를 겨누기까지 40일 간 행적을 더듬는 영화다. 대통령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등의 에두른 이름들이 ‘픽션’임을 강조하지만 10·26 사태 등 실화가 바탕임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엔딩 크레딧 직전엔 내란목적살인죄로 법정에 선 김재규의 최후 진술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의 수사 내용 발표가 육성으로 흐른다. 총선의 해에 나온 영화인 만큼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이병헌은 “난 정치를 잘 모르고 그런 쪽에 지식도 많지 않다”고 했다. 이번 영화는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인간관계와 심리 갈등에 흥미를 느껴” 참여했다고 털어놨다. 지난 16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다. 그가 우민호 감독과 작업한 것은 700만명을 끌어들인 청소년관람불가 잔혹 느와르 ‘내부자들’(2015)에 이어 두 번째다.

반전 없는 결말까지, 113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이 영화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은 건 베테랑 배우들이다. 특히 이병헌은 권력의 최측근 자리를 경쟁하는 2인자의 불안과 분노를 계량스푼처럼 정밀하게 조절했다. “각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를 반복하던 김 부장은 섭씨 99도까지 인내하다 100도가 되는 순간 끓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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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의 이병헌. [사진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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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실존 인물에 부담은 없었나.

A :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큰 사건 아닌가. 시나리오 안에서 그 인물이 가진 심리 상태와 미묘한 감정들에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몰입하자고 생각했다.”

김재규라는 문제적 인물에 몰입하려 관련 영상 자료를 수없이 돌려보고 생존 인물들의 증언을 한 다리 건너 접했다고 한다. 투박한 ‘된장 영어 발음’ 구사는 “당시 군 출신 엘리트 남성 느낌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극 중 자주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정돈하는 모습도 법정에 선 김재규에게서 힌트를 얻었단다.

“평소 정갈하게 가르마 타서 포마드를 발랐던 사람이 수감 생활로 흐트러진 머리에 예민해 하는 모습이었다. 영화에선 곽 실장과 한바탕 몸싸움 후에도 머리카락부터 추스르는 식으로 표현했다. 꾹꾹 감정을 누르다가 욱할 땐 활화산처럼 터지는 인물이다.”

영화는 1990년부터 2년 2개월 간 한 일간지에 연재된 동명의 취재기를 사료로 했다. 선후배 관계였던 김형욱-김재규를 친구이자 ‘혁명 동지’로 설정하는 등 가공도 거쳤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파리 유인 암살사건은 여러 ‘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그리고 가장 끔찍한) 걸 기반으로 했다.

Q :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부담이 있을 법한데.

A : “정치를 잘 모르고 그런 쪽 지식도 많지 않다. 사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도 ‘내부자들’도 사람들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볼 줄 몰랐다. 그냥 극 중 인간의 관계와 감정에 끌려서 (출연을) 결정할 뿐이다. 이 영화도 정치 이야기라고 보지 않는다. 서로 시기하고 충성 경쟁하고 1인자·2인자 간 갈등하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얘기 아닌가. 찍으면서 우리끼리 그렇게 자화자찬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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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7일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중앙포토]


영화에서 비밀 코드로 등장하는 ‘이아고’는 질투와 배신을 주제로 한 셰익스피어 작품 ‘오셀로’의 등장인물이다. 실제 ‘배신’이란 키워드는 영화를 통틀어 혁명이라 믿은 대업의 자멸 과정에서 종종 강조된다.

대통령의 삽교천행 헬기에 자리를 얻지 못해서, “탱크로 100만, 200만 명 밀어버리자”고 부추기는 꼴을 못 참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던 주군의 변심에 좌절한 김 부장의 폭주는 역사를 뒤바꾼 총성으로 이어진다. 그간 드라마, 재현극, 영화를 통해 숱하게 되풀이된 장면이지만 이병헌의 기쁜 듯 슬픈 듯 멍한 표정은 백 마디 말 이상의 혼돈을 압축한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 어떤 인물의 피를 본다고 생각해보라. 그 피에 미끄러지고 양말은 온통 피에 젖어 있고…. 어떤 결단·집념보단 그런 감정에 집중했다. 영화 찍기 전부터 감독님과 얘기한 게 역사에서 미스터리로 남은 것은 영화에서도 미스터리로 남기자고 했다. 끝난 후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

차기작은 한재림 감독의 영화 ‘비상선언’. 아카데미의 남자 송강호와 함께한다. 둘의 만남은 ‘공동경비구역 JSA’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에 이어 네 번째다. 연내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히어’(HERE)도 예정돼 있다.

“연기란 게 누군가 찾아줘야지 할 수 있는데 계속 노력해서 그런 위치를 유지하는 게 어려운 일 같다. 10년~20년 후 일은 모르겠지만, 배우생활을 계속한다면 ‘그 사람이 나오는 작품이라 보고 싶다’ 할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다.”

1시간 인터뷰 말미, “혹시 정치 제안받은 적 있나?”고 물었다.

“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의 동공이 전구처럼 커졌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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