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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안혜리의 비즈니스 현장에 묻다] “책 안 읽는 95%가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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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공학 전공 컨설턴트 출신

50 넘어 독서 앱 스타트업 창업

돈·영향력 뒤져 실패할 거라고?

BTS 보고도 그런 얘기하나



출판계의 넷플릭스 ‘밀리의 서재’ 서영택 대표



중앙일보

서영택 밀리의 서재 대표(맨 왼쪽)는 ’우리 회사엔 통상 생각하는 대부분이 없다“며 ’대표실도, 결제도 없다“고 했다. 사진 프레임에서 살짝 벗어난 바로 옆에 서 대표 책상이 있다. 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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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문제적 기업도 있다. 지금 출판계에선 ‘밀리의 서재(이하 밀리)’가 딱 그렇다. 모바일 독서 앱 서비스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4년째. 창립 50년을 훌쩍 넘긴 민음사 같은 대형 출판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스24나 교보문고처럼 온·오프라인 출판유통의 강자도 아닌 스타트업 하나가 죽은 듯 고여있던 출판시장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17년 3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월정액 전자책 서비스를 시작해 교보문고·리디북스 같은 후발주자를 양산하며 출판계에 구독경제 바람을 몰고 온 것을 시작으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톱스타 이병헌·변요한을 내세운 TV 광고로 100만 구독자(2019년 말 누적 기준)를 끌어모으더니, 이번엔 두 달에 한 권씩 김영하·김중혁 같은 유명 저자의 신간 종이책을 독점적으로 보내주는 ‘오리지널 종이책 정기구독’ 서비스를 들고나와 출판계를 또 한 번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책 읽는 5%가 아니라 책 안 읽는 95%를 공략한다’는 밀리의 파격적인 행보를 놓고 한쪽에선 “막가파식 마케팅 전략”이라고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출판 콘텐트 시장의 큰 변곡점” 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과감하다 못해 공격적인 마케팅은 그렇다 치고 연예계 톱스타와 스타 저자 등이 직접 읽어주는 리딩북(오디오북), 채팅하듯 말풍선으로 읽는 챗북, 유튜버와 함께하는 스트리밍 방송 등 기존 출판업계가 미처 생각지 못했거나 애써 무시했던 기발하고 톡톡 튀는 독서 관련 콘텐트를 잇따라 내놓는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종횡무진 영역을 넘나드는 재기발랄한 서비스만 보면 아직 머리가 말랑말랑한 20대 창업자를 상상하기 쉽지만 뜻밖에도 나이 50 넘어 창업한 서영택(54)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나이만큼 경력도 독특하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일찌감치 20대에 창업과 매각을 경험하고, MBA(노스웨스턴 켈로그) 졸업 후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컨설턴트를 거쳐 웅진씽크빅 CEO로 직장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좋은 스펙으로 대한민국에서 좋다는 경력은 다 누린 이 50대 남자는 대체 어떤 미래를 보고 다들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걱정하는 출판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었을까. 그보다 먼저, 20대와 50대의 창업은 과연 어떻게 다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미디어 기업이 즐비한 서울 상암동 밀리 본사에서 20~30대 직원들 사이에서 근무하는 서영택 대표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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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더디긴 하지만 국내 출판시장도 달라지고 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윌라의 오디오북.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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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이미 20대에 창업했던데.

A : “대단한 포부가 있었던 게 아니다. 어쩌다 보니 겉멋이 들어서…. 솔직히 직장 다니기 싫어서 창업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20대도 그 시절 나처럼 겉멋으로 하는 사람이 많더라. 자유롭게 살면서 잘하면 큰돈도 벌 수 있고 인생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니 직장생활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이 아니라 그냥 사장이 하고 싶은 거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지금 20대 젊은 친구들 역시 하나도 안 변한 걸 보고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국내 스타트업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Q : 50대 창업은 다를까. 나이 들어 창업할수록 성공 확률이 높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카우프만 재단에 따르면 나이 든 사업가가 성공할 확률이 젊은 사업가에 비해 2배 높다고 한다.

A : “경험상 안 믿는다. 창업은 나이 들수록 힘들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뛰어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실제로 성공 확률도 낮다. 그땐 실패해도 크게 잃을 게 없으니 과감하기도 했다. 나이 먹으면 경험은 쌓이지만 40~50대는 큰 꿈을 꾸기 어렵다.”

Q : 그런데도 50 넘어 창업한 이유는.

A : “난 언제 어디서든 항상 내 사업을 해왔다. 그래서 갈등이 많았고, 직장생활 내내 고통스러웠다. 사실 컨설턴트 생활 후 2년간 이런저런 사업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웅진씽크빅에 입사했다. 거기서도 1년 만에 ‘업무를 바꿔달라’고 요구해 신사업을 추진했다.”

Q : 그런 경험이 창업에 도움이 됐을텐데.

A : “그건 맞다. 20대 창업 때는 내가 모든 걸 지지고 볶으면서 다 했다. 지금 난 일을 안 한다. 컨설팅 역할을 한다. 젊은 직원들과 나는 출발점이 다르지 않나. 과거에 고민 많이 하고 심지어 이미 실패했던 걸 열심히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내가 실패했던 이유를 알려주며 적절한 조언을 해주려고 한다. 조언 아닌 지시가 될까봐 조심스럽긴 한데 스타트업에 머물지 않고 제대로 된 엔터프라이즈(기업)이 되려면 대표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조직으로 만들면 안 된다.”

Q : 그럼 어떤 조직을 지향하나. 그걸 보여주는 밀리만의 기업문화가 있나.

A : “기업문화가 좋아서 기업이 잘 되는 게 아니라 회사가 잘 되면 자연스레 좋은 기업문화가 자리 잡는 선순환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그래도 우리 나름의 지향점은 배달의민족의 ‘배민다움’을 따라 한 ‘밀리다움’에 담겨 있다. 실패해도 좋지만 실수를 빨리 인정하고, 비밀 없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생각도 공유하며 수평적으로 일하는 거다.”

Q : 그게 독창적 서비스의 배경인가.

A : “모든 창업자에게 꼭 권하고 싶은 방식이 있다. 밀리를 맨 처음 준비할 때 창업멤버 대여섯 명이 오전 10시 출근, 오후 4시 퇴근하고는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이건 될까 안될까, 안 해본 얘기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서비스도 그때 다 한 얘기들이다. 매일매일 미래를 생각하면서 자유롭게 대화한 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 규모가 커지기도 하고, 이런 대화가 쉽지 않다.”

※밀리 직원 수는 70여 명으로 늘었다. 개발·마케팅·콘텐트 인력이 각각 3분의 1을 차지한다.

Q : ‘읽어야만 독서인가요’라는 과거 광고 카피가 인상적이다.

A : “BTS가 음악 그 자체만으로 매출을 올리나. 아니다. 굿즈·공연 등 노래뿐 아니라 BTS와 관련된 모든 걸 즐기려고 돈을 쓴다. 음반이 전부이던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그런데 한국 출판시장은 여전히 저자가 쓴 활자 중심 책 안에만 머물러 있다. 중국만 해도 다르다. 책은 영화의 보고다. 그런데 판권만 팔아서는 손에 몇푼 못 쥐니 출판사들이 러닝 개런티로 달라고 요구하다가 이젠 아예 직접 영화까지 만든다. 지적재산권(IP)을 갖고 있으니 시장을 넓혀가는 것이다. 이미 이렇게 책 시장은 바뀌었고,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 앞에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변하지 않고 망하든지, 변해서 살든지. 다시 물어보자. 꼭 종이책을 읽어야만 독서인가. 난 책을 고르기만 하는 것도, 또 베스트셀러가 뭔지 검색하는 것도 다 독서의 범주라고 생각한다. 이런 독서와 관련한 일상에 관심이 많다. 그동안 이런 독서의 가치가 너무 억눌려 왔다. 1년에 책 1권도 제대로 안 읽는 95% 사람들도 이런 욕구는 다 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잠재 고객이다.”

Q : 그래서 TV 광고를 했나.

A : “서비스 초기 책 많이 읽는 사람들이 우리 서비스 욕을 많이 했다. 5000권으로 시작해서 지금 5만 권쯤 있는데 다독가들이 찾는 책은 늘 없기 마련이다. 그런데 1년에 1권 읽는 사람들 눈엔 5만 년도 읽을 수 있는 엄청난 분량이다. 진짜 타깃 고객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인지도는 올라갔고 이제 실제 구독(결제)으로 연결해야 하는 단계다.”

Q : 처음부터 투자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 그 비싼 모델로 TV 광고라니.

A : “전혀. 내 돈 일부와 출판사 네 군데서 각각 1억원씩 투자 받은 게 전부였다. 광고는 그달에 투자받은 돈 전부를 광고비로 집행했다. 국내는 5%만 책을 사는 시장이다. 거기에 투자하는 사업모델이라면 나 같아도 투자 안 한다. 우리의 메인 타깃은 나머지 95%라고 설명했지만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다행히 교보 등 큰 업체들이 구독 시장에 따라 들어오면서 시장이 커질 거란 기대에 투자도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듣는 얘기가 돈과 영향력 있는 교보 등이 더 잘 할텐데 무슨 경쟁력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억만금을 주고도 못 바꾸는 시간이라는 가치를 소비하는 고객이 우리 타깃이다. 고객도 서비스도 다 다른 시장인데 교보가 우리보다 더 잘한다? 그건 상상도 못 하겠다. 우린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랑 경쟁하는 거다.”

Q : 출판시장을 바꾸는 게 사업 목표인가.

A : “그런 원대한 꿈은 없다. 일단 살아남는 거다.”

■ 밀리다움:밀리가 일하는 방식 (발췌)

중앙일보

밀리 모든 직원 명함 앞면엔 본인 아닌 김영하 작가 얼굴이, 뒷면엔 정기구독권 번호가 담겨 있다.


멋진 일

좋게 좋게~가 없고 멋진 일을 추구합니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실수는 빨리 인정합니다

동료

소통하고 공유하며 일합니다. 비밀은 없습니다

경청하되 논란이 생길 일이라 해도 생각한 것을 말합니다

합리

수평적으로 일하며 동료를 존중합니다

모든 제도와 룰은 밀리가 자율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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