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6 (일)

1617년 유럽에 도착한 고려인삼… 루이 14세도 반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동서양 잇는 인삼 네트워크 연구

서구 문헌 탐구해 세계사 구성

인삼 발견한 미국, 중국에 수출

'동양의 사치'라는 이미지 덧씌워 이후 서구학계서 관심 두지 않아

조선일보

인삼의 세계사|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464쪽|2만5000원 ‘인삼의 세계사’ 연구는 우연에서 비롯했다. 서양사학자 설혜심 연세대 교수는 1995년 여름 미국 어느 쇼핑몰에서 ‘아메리칸 진생 페스티벌’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미국 인삼이라니? 인삼은 한국 고유의 산물 아니었던가? 이후 ‘미국 인삼’이 머릿속에 남았지만, 미국 학자들도 관련 사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2013년 겨울. 19세기 영국 소도시 지역신문 데이터베이스가 새로 구축됐다. 재미 삼아 ‘ginseng(인삼)+Corea(한국)’를 입력했다. 무려 200개 넘는 기사가 검색됐다. “19세기 영국의 작은 도시에서 발행된 신문에 한국 인삼을 다룬 기사가 이렇게 많다니!”

설 교수는 "오기가 발동했다"고 한다. 인삼이 언급된 서양 문헌을 샅샅이 뒤졌다. 신문기사를 비롯해 식물학서, 보고서, 지리지, 여행기, 편지, 시·소설 등에서 인삼을 언급한 자료를 끌어모았다. 설 교수는 연구를 통해 "인삼이 17세기부터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에서 매우 중요한 상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인삼이 전근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조공과 무역을 통해 유통됐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서양을 아우르는 인삼 네트워크가 있었다는 사실은 서구 역사학계에서도 제대로 다룬 적이 없다.

조선일보

1686년 예수회 선교사 기 타샤르가 쓴 책 '예수회 신부들의 시암 여행'에 실린 삽화. 인삼이 사람처럼 걸어다니는 모습을 그렸다.


고려인삼이 유럽에 상륙한 사실을 알리는 첫 문헌은 1617년 영국 동인도회사 일본 주재원 리처드 콕스가 본사에 보낸 통신문이다. "한국(조선)에서 온 좋은 뿌리를 보냅니다. 이 뿌리는 너무 귀해서 보통 사람의 손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한국과 교류할 수 있는 쓰시마 번주에 의해 일본 천황에게 보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약으로 간주되며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에 충분합니다." 콕스가 보낸 고려인삼 꾸러미는 남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17세기 대항해시대 인삼 교역을 연 첫 장면이다.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도 '신비의 명약'에 관심을 기울였다. 16세기 말 중국에서 출간된 '본초강목'에 인삼의 효능이 실려 있었고, 선교사들은 관련 내용을 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영어·러시아어·스페인어 등으로 번역했다.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알바루 세메두는 1643년 중국을 소개한 책 '대중국지'에서 "중국인이 최고의 강장제로 꼽는 인삼이 요동 지역과 한국에서 난다"고 적었다.

인삼은 서양에서 귀한 상품으로 유통됐다. 영국 귀족들은 동양에서 온 귀한 뿌리를 선물로 주고받았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에게 진상되기도 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인삼이 너무 귀해서 파운드당 25플로린(금화의 단위)에 팔렸다" 한다.

1716년 북미 지역에서 '인삼'을 발견한 것은 세계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신부가 캐나다 지역에서 발견했다. 미국에서도 인삼 발견이 이어졌다. 1720년 미시간 지역에서, 1738년에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발견됐다.

인삼은 신생국 미국의 재정 독립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의 첫 수출품이 인삼이었다. 1784년 뉴욕항에서 중국으로 떠난 상선에 실린 미국 인삼은 전체 화물 금액 27만달러 중 24만달러를 차지했다. 설 교수는 "이 사실은 미국 역사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이야기"라고 했다. 설 교수는 미국·유럽 학계에서 인삼 네트워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을 '오리엔탈리즘'에서 찾는다. 인삼은 커피의 카페인이나 아편의 모르핀처럼 유효성분을 추출하기 까다로운 식물이기에 서양 근대 약학 시스템에 늦게 편입되었고, 동양의 비합리성과 사치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인삼에 덧씌우며 타자화했다는 것이다.

인삼을 주제로 방대한 세계사를 구성한 필력이 감탄스럽다. 진지하고 충실한 연구서다.

[이한수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