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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박완규칼럼] 정당정치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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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과 희망을 말하지 않는 선거 / 재난 견디는 국민은 안중에 없어 / 비례정당 후보 공천은 난장판 / 18세, 첫 투표서 뭘 배우겠는가

정치는 사람들에게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해나가는 것이라고 배웠다.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위기에 직면했지만 정치인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소모적 논쟁만 일으킨다. 21대 총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걱정이 앞선다. 정당정치는 난장판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파열음을 낸다. 유권자들이 아무리 인상을 써도 사과 한마디 들을 수 없다. 오만이 극에 달했다. 갈등과 분란이 심한 우리 사회의 근본 병인(病因)이 정치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세계일보

박완규 논설실장


정당의 후보 공천이 문제가 되고 있다. 공직선거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은 정당의 중요한 역할이다. 정당의 충원 통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당의 공천제도와 과정은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사당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총선 때마다 주요 정당들이 시간에 쫓겨 밀실 공천이나 낙하산 공천을 하고, 후보들은 선거운동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 정책 대결 대신 흑색선전 등에 승부를 거는 처지로 몰린다. 이번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정당들이 ‘시스템 공천’, ‘혁신 공천’을 한다고 했지만 공천받은 후보들 면면을 보면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많다.

이번 선거에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까지 껴들어 문제가 한층 복잡해졌다. 여당이 선거개혁을 명분 삼아 공직선거법 개정을 주도했지만 허점투성이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 탓이다. 거대 양당이 비례위성정당을 급조하는 데 이르렀다. 우리 정치권의 상상력이 딱 이 수준이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은 각각 더불어시민당과 미래한국당이라는 비례위성정당을 내세워 비례대표 의석을 노린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시민사회계 원로들이 참여한 정치개혁연합을 배제해 명분을 잃었고, 한국당은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싼 통합당과의 갈등으로 지도부가 교체돼 공천을 다시 하게 됐다. 두 비례위성정당 모두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창당뿐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 검증작업도 졸속으로 마무리했다. 거대 양당이 비례위성정당 후보 공천에 공공연히 관여해 선거법 위반 논란까지 빚었다.

정당의 정체성 문제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저리 찢어졌다가 합치거나 특정 정치인 중심으로 급조되다 보니 정당의 정체성이 모호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명멸한 숱한 정당들 가운데 두 차례 이상 총선에 후보를 공천한 정당은 8개에 불과한데 지금까지 이름이 남은 곳은 하나도 없다. 현존 정당 가운데 미래통합당과 민생당은 지난달 각각 정당 통합 과정을 거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이밖에도 신생 비례대표정당 등이 속속 생겨났다. 정당 이름만으로는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기가 어렵다. 이 와중에 민생당은 소속 비례대표 의원들이 ‘셀프 제명’으로 흩어졌다가 법원의 효력정지 판결 이후 다시 탈당해 다른 당 후보로 출마한다. 유권자 입장에선 헷갈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21대 총선에선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낮춰졌다. 고교 3년생 상당수가 투표할 수 있다. 이들이 난생처음 참여하는 선거를 무엇으로 여길지 우려된다. 대학입시에 바쁜 이들이 지금의 선거제도와 정당 행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18세 관람불가 영역 아닌가. 정치의 새싹들에게 정치 혐오증부터 불어넣을지도 모른다. 이럴 거면 왜 굳이 선거연령을 낮췄는가.

많은 유권자들이 출퇴근길에서 만나는 후보나 선거운동원을 외면한다. 정당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이라고 자위하는 듯하다. 후보들은 유권자와 접촉하기 어려우니 골목마다 소독하러 다닌다. 사람들은 외려 선거운동이 조용해져서 좋다고 한다. 정당들은 이런 유권자들의 반응을 심각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다.

권력을 위임받을 대표를 선출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시금석이다. 하지만 이번 총선이 민주주의 축제가 되기는 애당초 틀린 것 같다. 정치인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선거에서 무조건 이기면 된다는 생각이라면 유권자 수준을 무시한 것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 하는 상황에서 묵묵히 코로나19를 이겨내고 있는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안중에 없다. 이러고도 유권자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한다면 후안무치가 아닐 수 없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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