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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구병모 "작가는 도돌이표 같은 고민 반복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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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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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이란 무엇인가. 고통을 겪은 흔적의 영원한 각인, 통점(痛點)을 통과한 감각을 누적하는 행위다. 각인시키고 누적함으로써 그것이 새겨진 살갗은 '의미의 영속성'을 획득한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기를 과시하고 장식하려 문신을 장난처럼 새기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문신은 영원한 초월을 경험하려는 간절한 증거로 이해돼 왔다.

타투를 소재 삼은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인간과 인간다움'을 질문하는 독특한 소설이 출간됐다. 새 장편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아르테 펴냄)를 출간한 구병모 소설가(44)와 최근 이메일로 긴 대화를 주고받았다. 상처의 극복, 신체의 통제, 여성의 연대, 진실의 불투명성을 질문하는 소설이다. 왜 문신이었을까.

"문신에 담긴 기억 행위나 기념 등 여러 의미 가운데 기원(冀願)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을 생각하다가 평범한 중년 여성이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어떤 마음이, 어떤 결의가, 때론 어떤 복수심 같은 것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게 할까라는 질문에서 소설은 출발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다. 직장 막내 '화인'은 엄마뻘 선배 '시미' 도움으로 사내 성희롱에서 벗어난다. '상무'로만 표현된 직속상사가 화인 목덜미의 타투를 쓰다듬으며 "발랑 까진 아가씨"라고 조롱하자 시미가 들고 일어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둘은 유대를 쌓는다. 시미는 화인 타투에서 '불꽃'을 봐버리고 타투 가게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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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을 한 분들은 대체로 뭔가를 기억하려 의미 있는 날짜, 의미 있는 구절을 몸에 갖고 계셨어요. 문신은 금기 위반의 의미가 크지만 보편 규범과 타인 시선에 종속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보였습니다." 살갗에 바늘을 관통시켜 뭔가를 초월해 새긴 시미 문신은 상처의 극복에 가닿는다.

회사 막내의 몸에 손을 대는 상사, 딸의 문신을 보고 가위를 들어버린 친부는 타인의 신체를 재단하는 권위의 타인을 은유한다. "뭔가가 침해당하거나 훼손당해서 그 모욕을 견뎌야 하는 일은 특별한 몇몇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모눈방안지 한 칸 같은 자리에서 한 발자국만 비켜서려고 해도 발생하는 일이니까요."

여성의 현재성에 렌즈를 가까이 대는 구병모 작가의 글이 겨냥했던 과녁은 오래전부터 '인간'이었다.

세상에 '구병모'를 각인시킨 장편 '위저드 베이커리'의 심사평부터 그랬다. '…세계에서마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저 악몽의 인과율을 간파해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새롭고 무섭고 거세다.' 세계에 은폐된 인과율을 바라보는 것이 소설 쓰기일까. 소설은 그에게 무엇일까.

"쓰다 보면, 죽기 직전에는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대답을 들려주지 못한 채 떠날 것이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단언할 수 없어요. 작가는 도돌이표 같은 고민을 살아 있는 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12년 전 등단해 '파과' '네 이웃의 식탁' '단 하나의 문장' 등 수많은 소설을 부지런히 남긴 그는 사실 12세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그가 오랫동안 앉았던 골방의 풍경을 물었다.

"물리적으로 발 디딜 틈 없는 진짜 골방에서 쓰는데, 마음속 풍경은 달라요. 저의 골방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고 원색적인 욕설이 오가는, 누구나 흙발로 쳐들어오는 저잣거리에 가깝습니다. 진흙탕에서 피어났다고 해서 소설이 아닌 건 아니니까,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 구병모 소설가 이메일 인터뷰 전문(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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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 혹은 소수자의 현재적 고통을 담담하게 들여다보는 소설을 써오셨다고 독자로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이번 소설을 착안, 착상하신 첫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또 '문신'이라는 소재를 생각하신 계기도 함께 여쭙습니다. 고통과 문신, 맞닿는 지점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문신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지금 이 서사와 결부시킬 생각은 없었고, 예술사적 미시사적인 측면에서의 막연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문신에 담긴 기억 행위나 기념이나 등 여러 가지 의미 중에 기원(冀願)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나서, 지금 현재 평범한 중년의 여성이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마음이, 어떤 결의가, 때로는 어떤 복수심이 그런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게 할까? 문신 자체의 미학이나 에로티시즘보다는 그 문신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간절한 마음과 함께 새긴 문신이라면, 그 문신이 실체화되어서 현실에 어떤 작용을 하거나 현실의 잘못된 상태를 바꾼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저한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저는 소원 성취 서사에는 각별한 경험이 있으니까요.

2. 소설 읽는 내내 문신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선생님 표현을 곳곳에서 빌린다면 문신은 단지 단순한 외적 이미지가 아니라 고통을 겪었던 흔적의 영원한 간직 혹은 기록, 또는 통점을 통과했던 감각을 몸에 새김으로써 고통을 하나의 어떤 증거, 형체로 남기는 행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가 만나본 분들은 대체로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자신에게 의미 있는 날짜나 의미 있는 구절을 몸에 갖고 계셨습니다. 그 외에 예뻐서 장식으로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소설 속에서 문신술사는 남겨두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랬고, 주인공은 몸에 남는 거니까 굉장히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남는다 혹은 남긴다의 의미는 소설에서 스포에 해당하는 거니까 그 부분은 일단 생략하기로 하고요. 최소한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문신의 의미는 금기 위반의 의미가 제일 큰 것 같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그 의미를 구실 삼아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문신을 새기기를 망설이는 이유도 그것이지요.

문신을 상대방에게 보이도록 노출하는 것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가 안 되는가 그 주제를 놓고서 변호사들이 라디오재판정에서 다룬 콘텐츠가 불과 작년 하반기의 일일 정도로 우리 인식에는 그건 웬만해서는 하면 안 되는 거, 한번 해버리면 문제 있는 사람, 이렇게 많이들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남들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는 점에서, 보편 규범이나 타인의 시선에 종속당하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걸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3. 시미, 화인 등 뭔가 침해당하거나 훼손된 순간을 '견디는' 사람들이 다수 등장한다고 느꼈습니다. 폭력 뒤에 자신을 숨기고 숨 죽여 자신을 지키는 사람들은 현재의 소수자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오늘날의 타자들이랄까요. 그러한 자리에 선생님의 렌즈를 가까이 대신 이유를 여쭙습니다.

그런 순간을 견디는 사람들이 어디 멀리 있거나 숨어 있다고 생각지 않고, 저도 참는 게 있고 기자님도 참고 계신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소수자이거나 타자인가, 하면 또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말하자면 자신의 중요한 뭔가가 침해당하거나 훼손당해서 그 모욕을 견뎌야 하는 일이, 특별한 몇몇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자기가 서 있는 이 모눈방안지 한 칸 같은 자리에서 딱 한 발자국만 옆으로 비켜서려고만 해도 발생하는 일이에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게 언젠가 내 차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 우리는 타인을 함부로 훼손하는 데에 자기도 모르게 동참하는 일을 줄여나갈 수 있을 거예요.

4. 타인의 신체를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훼손하려는 상무, 화인 생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신체에의 불손한 통제라는 의미로 읽히는데, 약자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이유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역시 마찬가지로 강자 역시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이유로 어디엔가 암약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앞의 이야기와 조금 이어질 것 같은데, 이 사람들도 어디 다른 데 가면 누군가에게는 상대적으로 약자로 위치하면서 부당한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모르고 계속하는 사람도 있고, 알고도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무나 화인 생부 같은 사람들은 한국의 사회 문화에서는 워낙 숨 쉬듯이 흔한 유형의 가해자들이다 보니까, 딱히 이들에게는 뭐라고 존재 이유나 의의를 붙여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5. 흔히들 소설이나 문학을 '인간을 향한 질문'으로 표현하고는 합니다. 선생님 소설을 읽다보면 인간을 향한 질문 가운데에서도 조금 구체적으로 살피건대 '인간다움에 관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과거 인터뷰를 찾아보니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생각이나 타인과 투쟁을 해 나간다고 해야 할까요. 그 무한한 투쟁 과정이 결국은 인간다움의 증거가 아닌가 싶어요." '인간다움에의 투쟁'에 대해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말하기에 강한 작가와 글쓰기에 강한 작가가 있는데, 저는 글쓰기에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작가입니다. 그래서 사전 질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대면으로 진행된 인터뷰의 경우는,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하는 수가 많습니다. 사실 그 단락에서 정확하게 제 의사를 표현한 대목은 "인간은 계속 상대방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습성이 있다"는 인간에 대한 환멸의 정서, 그것 하나뿐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습니다. 투쟁이라는 워딩이 잘못 선택된 것 같지만 그 당시 제 마음속 상태가 그만큼 안 좋다는 것을 말하느라 그렇게 된 것 같고, 어떻게든 말하기를 계속 이어나가다 보니 '인간다워지기 위해 싸워나간다'는 뉘앙스가 되어버린 것인데, 사실 그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내릴 만한 결론이 아닙니다. 계속 오해하고 서로를 거부하며 왜곡하는 게 인간이라는 것,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싸워나가는 것, 즉 여기서의 인간다움이란 우리가 어차피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인간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이야기로, 결코 다정함이나 위로 같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지 않은 것입니다.

6. 이번 소설의 바깥에서, 선생님께 소설이란 어떤 것이었을지를 함께 여쭤보고자 합니다. 오래 전 '위저드 베이커리' 심사평 가운데 다음 표현이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 소설을 '간파'한 문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세계에서마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저 악몽의 인과율을 간파해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새롭고 무섭고 거세다." 세계에 숨겨져 있는 어떤 인과율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소설쓰기일까요. 소설이란 선생님께 무엇일까요.

그걸 알았다면 저는 이미 안 쓰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의미를 굳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다 보면 죽기 직전에는 그 의미를 알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대답을 들려주지 못한 채 떠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대답을 찾아 평생을 바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토록 잡히지 않는 것, 뭐라고 허울 좋은 말로 꾸며보아도 도무지 그럴듯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 아무도 그것에 대해 단언할 수 없고 그 주체는(작가는) 도돌이표 같은 고민을 살아 있는 한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 여기까지가 소설이 갖는 예술로서의 속성에 대해 해본 생각이고, 일단 지금 생각으론 예술을 한다고 해서 그 예술의 의미나 이유를 탐색하는 데에 비장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에게 갖는 의미는 생계유지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노동과 갖는 교집합은 점점 더 커질 테고요.

7. 이번 책의 '작가 노트'에서 "고통과 황홀, 환영과 추방, 죽음과 삶의 양면성에 사로잡히는 것은, 양면성이라는 자기장 안에 존재하는 인력과 척력이 인류의 발생 및 존속의 원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 가능하실까요.

간단한 자연의 상식을 오히려 너무 풀어서 자세히 설명해버리는 바람에 잘 와 닿지 않았다고 느끼셨을 수 있습니다. 딱 한 가지로만 대표하면 빛과 어둠 이야기입니다. 빛만도 아니고 어둠만도 아니고, 빛과 어둠이 둘 다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순환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 소설의 제재가 된 문신은 그 같은 반대되는 성질을, 흔히 우리가 긍정적인 뜻/부정적인 뜻으로 판독하는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은 긍정이고 어둠은 부정일까, 생각하면 꼭 그렇게 가를 수 없습니다. 어둠은 주로 악의, 음모, 약탈, 죽음 같은 것들과 짝지어져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잃은 채 존재했지만 사실은 빛보다 먼저 있었던 거잖아요. 빛과 어둠이 맞닿은 면, 어디까지가 빛이고 어디부터가 어둠이지? 하고 모호해지는 지점들이 있는데 그 모호한 결을 더듬어나가는 게 예술이기도 하고요.

8. 가장 좋아하는 단 한 명의 소설가 혹은 작품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혹은 문장이어도 좋습니다. 국내·외 불문입니다.

좋아하는 소설가도 작품도 너무 많아서, 대신 제일 오래도록 남은 문장을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일부)"

9. 등단 시점을 떠나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신 '처음'에 대해 여쭙습니다. 왜 써야 했고, 왜 소설이어야 했을까요. '소설 쓰는 구병모'의 처음 그 순간이 궁금합니다.

소규모의 내밀한 공간, 녹화되지 않고 음성이 발화되는 순간 사라지는 자리에서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몇 번 한 적 있는데, 공개된 지면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습니다. 다만 넓은 의미에서 생사 문제가 걸려 있었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그것을 부를 용어도 따로 없었으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인데 저 개인의 PTSD, 트라우마와 관계 있습니다. 나이도 먹었으니 지금도 잠을 못 이룬다 정도는 아니고 자다가 갑자기 깨어나는 수준으로, 그냥 계속 이 안에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기만 한 건데요. 그러고 보니 이번 소설과 겹치는 지점이 있네요. "실은 피부에 새겨진 건 자신의 심장에도 새겨지는 겁니다. 상흔처럼요. 몸에 입은 고통은 언제까지고 그 몸과 영혼을 떠나지 않고 맴돌아요. 아무리 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지요."(138쪽) 뭔가 외국에 처음으로 인터뷰 자료를 내보내야 할 때라든가, 소설가를 꿈꾸는 분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가끔 반복되는 질문이 바로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계기' '왜 소설가가 되려고 했는가' 같은 것인데요, 그때마다 어쨌든 거짓은 아닌, 사실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들을 뽑아내어 적당히 방어막을 칩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너머의 진실이 있고 그것을 꾸준히 복기하는 일이 정신 건강에 좋지는 않으니까, 강연 자리는 최대한 피하고 유소년기 테마로 회고담 형식의 에세이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집필을 사양하는 것으로써 저를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10.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느 소설가분이든 시인 분이든 인터뷰 때 반드시 동일하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흔히들 골방이라고 표현하게 되는데 물리적 장소로서 골방이 아니라 쓰는 순간의 풍경이야말로 바로 골방일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고 있는 순간' 선생님의 골방 풍경이 궁금합니다. '소설가 구병모의 골방'에는 무엇이 있고 누가 지나갈까요. 어떤 구조물이 설치돼 있을까요. 다소 관념적인 질문입니다만 비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관념적으로 물어봐주셨는데 저의 대답이 그에 맞지는 못할 것 같아 읽어주시는 분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일단 물리적으로는 진짜 발 디딜 틈 없는 골방에서 쓰긴 하는데 마음 속 풍경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고 원색적인 욕설이 오가는, 누구나 흙발로 쳐들어오는 저잣거리에 가깝습니다. 평정심을 갖고 우아한 자세로 집중해본 적이 별로 없다는 뜻도 될 수 있는데, 진흙탕에서 피어났다고 해서 소설이 아닌 건 아니니까 그건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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