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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일사일언] 할머니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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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라윤 간호사·'무너지지 말고 무뎌지지도 말고' 저자


근무가 끝나고 나면,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다 보니 마음이 우울의 늪으로 젖는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맛있는 것을 먹으며 맥주 한 잔으로 씻어 내거나,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무거워진 마음을 덜어낸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퇴근 후 집에 와서 텔레비전을 켰다. '스페인 하숙'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인데, 스페인의 한 마을에 하숙집을 차리고 여행객들에게 "올라~" 인사를 하는 배우 유해진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리고 인터뷰가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사람들과 마주치며 인사를 하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진다는 얘기였다. 하긴, 우리는 인사를 하며 얼굴을 찡그리진 않는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누군가 인사를 해오면 대개 웃음으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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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간호를 맡은 할머니가 있었다. 뇌졸중을 진단받았고, 치매 과거력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아무리 아픈 치료를 받아 의식이 없다가도 내가 근무를 할 때면 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눈을 뜨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점심, 저녁으로 오던 보호자들도 참 이상하다며 내게 "24시간 근무를 해야 되는 것 아니냐"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내가 서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을 때면 할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날 뿌듯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따뜻한 웃음에 나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며칠째 지속된 근무에도, 언제 피곤했냐는 듯이.

그 후로 생긴 버릇이 있다. 짜증이 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입으로 웃는 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그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날 괴롭히던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평온한 일상이 사라진 요즘,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설 때면 빙그레 웃어보는 건 어떨까?

[이라윤 간호사·'무너지지 말고 무뎌지지도 말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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