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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기자가만난세상] 한국인과 ‘잘난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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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시절 어른들한테 “너보다 잘난 친구를 많이 사귀거라”라는 충고를 자주 들었다. 입으로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실은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저 말대로면 ‘잘난 친구’들은 ‘더 잘난 친구’를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잘난 친구’들이 자기네보다 못난 날 만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땐 이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질 못했다. 혼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한참을 잊고 지내던 그 충고를 다시 떠오르게 한 게 지난달 만난 A(36·여)씨였다. 그는 필리핀 출신이다. 한국인 남편과 2006년 5월 결혼했다. 지금은 충청권에 살며 다문화가정을 위한 통역사로 활동 중이다. A씨는 한국인이 출신 국가에 따라 외국인을 차별하는지를 묻자 “그렇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잘사는 나라에서 온 백인은 덜 차별받는 것 같다”고 했다. 반면 “우리 같은 인종(아시아계)은 대부분 어려운 나라에서 와서 더 차별받는 것 같다”고 했다.

세계일보

배민영 특별기획취재팀


A씨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세계일보가 연재기사 ‘한국형 외국인 혐오 보고서’를 위해 국내 외국인 207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이 피부색에 따라 외국인을 차별한다는 응답이 10명 중 6∼7명에 달했다. 한국에서 인종차별을 겪었다는 응답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자신들보다 피부가 하얗고 돈 많은 나라에서 온 ‘잘난 외국인’한테만 잘해주는 인종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경제성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인이 ‘세계시민’이자 어엿한 ‘주인장’으로서 외국인 손님맞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 2010년 G20(주요20개국) 정상회의, 2018년 평창올림픽 등 지구촌 축제와 국제회의를 잇달아 열었다. 모두 지구촌의 당당한 일원이 되려는 노력이었다. 세계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인은 외국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음을 설문 결과는 보여주고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한국 사회에선 ‘인종차별’의 개념조차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박경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와 김연주 난민인권센터 변호사, 하은호 사단법인 이주민사회통합지원센터 이사장 등 전문가들은 “그 어떤 국가기관도 인종차별이 뭔지 정의조차 내리지 않고 있다”고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이 문제에 팔을 걷어붙여야 할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손 놓고 있었다. 인종차별을 이유로 접수된 진정 사건은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었다. 취재팀의 정보공개 청구에는 ‘그런 자료를 별도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제출을 거부했다. 하지만 의원실로부터 비슷한 자료를 요구받자 없던 자료는 금세 만들어졌다.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민방위 교관에게 항의했다가 “퇴소당하고 싶냐”고 협박당한 진정인의 사연은 이런 과정을 거쳐 소개됐다. 올해로 설립 19년을 맞은 인권위의 민낯이다.

기사가 나간 뒤 “어느 선진국을 가도 인종차별은 심하다”는 독자 의견이 많았다. “우리 정도면 양반”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많이 순화해 소개한 거다. 옛날엔 못했던 질문, 이젠 용기 내 해보고 싶다. 피부 하얀 선진국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인종차별쯤은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거냐고. 좋은 것도 많은데 하필 그런 걸 우리가 본받아야 하느냐고.

배민영 특별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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