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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기업 경영 전략 수립 최전방에서 수학이 활약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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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조선]
빅데이터·AI 바탕에는 수학
기하·벡터 수능 제외는 역주행
中 수학 강국 만든 장쩌민

조선비즈

박형주




서울대 물리학, 미국 UC 버클리 수학학 박사, 미국 오클란드대 수학과 부교수,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 포스텍 수학과 교수, 서울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소장 / 김흥구 객원기자
"요즘 같은 세상(감염병 유행)이 찾아올 때마다 예로 드는 일화가 있습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관한 이야긴데요. 1854년 크림전쟁 참전 당시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게 무엇이었을까요. 따뜻한 간호? 헌신적인 태도?"

추적추적 쏟아진 봄비가 고요한 캠퍼스를 흠뻑 적신 3월 10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에서 박형주 총장을 만났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건물 입구에서 발열 검사를 받고 올라왔다고 하자 박 총장이 대뜸 110년 전 세상을 뜬 나이팅게일을 소환했다.

"나이팅게일은 영국군 야전병원의 각종 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나이팅게일 로즈(장미) 다이어그램’을 만들어 사망자 대부분이 전투 중 당한 부상이 아닌 비위생적인 환경과 전염병의 영향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죠. 그가 합류한 뒤 야전병원의 환자 사망률은 42%에서 2%로 떨어져요. 나이팅게일을 영웅으로 만든 건 수리통계입니다."

수학자인 박 총장이 예의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인터뷰 시작부터 수학의 힘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나이팅게일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수학적으로 접근하면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있다"며 "감염병 억제는 물론 빅데이터·인공지능 같은 신기술 분야에서도 수학은 빠뜨릴 수 없는 중심축이다"라고 강조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수학자(정은옥 건국대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 신기하다. 과거와 다르다.

"조용히 연구에만 매진하는 학자가 많아 그간 드러나지 않았을 뿐 수학은 늘 사회·경제·경영 문제 해결 현장의 중심에 있었다. 일례로 조류 인플루엔자가 생소하던 시절에는 철새만 바이러스를 옮기는 줄 알았다. 방역 대책도 철새가 모이는 지역 위주로 수립됐다. 그런데 수학자들이 빅데이터를 돌려 감염 경로를 추적해본 결과 조류 인플루엔자가 고속도로를 따라서도 이동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철새뿐 아니라 축산 차량도 방역 대상에 포함돼야 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빅데이터 기술의 토대는 수학이다. 수학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철새만 쫓고 있을 것이다."

빅데이터뿐 아니라 인공지능 기술의 핵심도 수학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기업의 올해 상반기 신규 채용 계획을 조사해 발표한 자료를 봤다. 눈에 띄는 부분은 기업들이 인력이 가장 필요한 분야로 빅데이터(63.5%)와 인공지능(38.9%)을 꼽은 것이다. 수학 잘해 두면 취업도 잘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학생들의 학습 부담 완화를 이유로 2021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학 과목 출제 범위에서 기하와 벡터(vector)를 제외했다. 기하·벡터를 모르는 상태에서 인공지능의 핵심 기술을 이해할 수는 없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퇴행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정부가 ‘학습 부담 완화’를 도와줘야 할 만큼 ‘수포자(수학 포기자)’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입시 위주로 짜인 한국식 교육의 부작용 아닐까.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구조를 즐길 수 있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되겠나. 빨리 푸는 건 기계가 해주는 세상이다. 사람은 논리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공부하는 맛도 난다. 프랑스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는 모든 문제를 서술형으로 낸다. 서술형 문제 도입의 가장 큰 걸림돌은 평가에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학 입시 SAT가 서술형 도입을 테스트 중인데, 1차 채점을 딥러닝(심층학습) 기술이 하고 2차 채점을 인간이 하는 방식이란다. 우리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주입식 교육보다 선다형 평가가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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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주(맨 오른쪽) 아주대 총장이 2014 서울세계수학자대회에서 ‘수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박 총장은 당시 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 세계수학자대회
‘수포자’가 많은 동시에 ‘수학 올림피아드 강국’ 타이틀도 쥐고 있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하는 학생은 일반 수학 교육의 범주에 있는 학생과 다르다. 한국 수학 영재들의 실력은 정말 대단하다. 수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 역대 수상자 정보를 분석해보면 어린 시절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해 입상한 사람이 꽤 된다. 매년 올림피아드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한국도 앞으로 필즈상의 쾌거를 기대해볼 만하다는 의미다."

미국은 수학 박사의 30%가 기업에 입사하는데 한국은 이 비율이 10%도 안 된다고 한다. 산업수학 경쟁력을 키우려면 기업으로 가는 수학자가 많아야 하지 않나.

"예전에는 수학 박사 학위자가 기업으로 가면 ‘실패자’로 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잔재 또는 직업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문화의 영향이었을 거다. 중요한 건 최근 들어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혁신가에 대한 존경의 문화가 커지면서 자연스레 기업행을 택하는 수학자가 늘고 있다. 학교만 고집하던 과거 현상은 사라졌다. 앞으로는 외국처럼 기업 경영 전략 수립의 최전방에서 수학이 활약하는 사례를 자주 접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줄 수 있나.

"과거 후발 주자였던 구글이 검색 시장에서 공룡 야후를 누를 수 있었던 건 응용수학 전공자인 래리 페이지와 수학 천재 세르게이 브린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아마존의 물류창고가 축구장 5개를 합친 크기다. 그 광활한 공간에서 상품의 최적 보관 위치를 설정해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는 존재가 물류 로봇 ‘키바’다. 키바 알고리즘은 수학의 최적화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세계적인 수학자이면서 헤지펀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 창업자인 제임스 사이먼스, 위상수학을 적용한 소프트웨어로 큰 성공을 거둔 수학자 군나 칼슨 등도 수학자가 경영을 이끈 우수 사례다."

정부 차원의 수학 지원 노력도 중요하겠다.

"2002년 중국 베이징에서 세계수학자대회(ICM)가 개최됐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장쩌민이었는데, 그는 21세기 첫 ICM을 중국에서 열기 위해 직접 전 세계를 돌았다. 개막식 날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한 번은 기자들이 장쩌민에게 취미를 물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며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답했다. 진짜인지 의도한 발언인지는 모르겠으나 수학 강국을 향한 국가 지도자의 태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 이후 중국 정부는 수학 분야에 대한 연구비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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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범 이코노미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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