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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그들은 어디로 갔나…4·3 행방불명인 5천여명 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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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2주기 기획] 잠들지 않는 동백

② 행방불명된 수천의 진실


정부보고서(2003년) 3171명→3610명(2019년)

올해 추가조사 결과 4255명…전체 5천명 추정

제주도 내에서만 최소한 1877명 행방불명으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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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님이 인천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서>에는 다르게 나와서 방문하게 됐습니다. 이 기록이 맞는 건가요?”

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김정용(64)씨는 제주4·3평화재단을 찾아 상기된 표정으로 숙부의 행적을 물었다. 김씨는 그동안 4·3 당시 숙부(김윤일)가 인천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단이 펴낸 추가조사보고서에는 숙부가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된 뒤 행방불명된 것으로 돼 있다.

김씨는 “1977년 해병대에 지원 합격했는데 관내 지서에서 두 차례나 찾아와 신원조회를 했다. 당시 교편을 잡고 계셨던 아버지가 ‘동생(숙부)이 4·3때 인천형무소에 갔다가 행방불명됐지만, 다른 일은 모른다’며 경찰과 다퉜다”고 기억했다. 김씨는 “어떻게 군입대 하려는 것을 취소하라고 할 수 있느냐”며 그 뒤로는 숙부의 행방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서귀초급중학교에 다니던 김씨의 숙부는 1949년 7월 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인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한국전쟁 직후 형무소 문이 열리자 귀향했다. 그러나 1950년 8월18일 예비검속돼 서귀포농회 창고에 수감된 뒤 행방불명됐다. 지난 2007~2009년 제주공항 유해발굴을 통해 380여구의 유해가 무더기 발견됐고 이 가운데 일부 유해는 유가족들의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서귀포 지역에서 예비검속된 행방불명인(행불인)들로 밝혀졌다. 김씨는 “이제 숙부님의 행적을 알게 됐으니 채혈 등 유전자 감식을 통해 유해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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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중산간 지역 주민들은 살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었는가 하면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다. 군·경은 남아있는 가족들을 상대로 피신한 자녀나 남편, 아내 등 가족을 찾아내라며 닦달했고 남아있는 가족들을 대신 처형하는 이른바 ‘대리학살’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군경은 1949년 3월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했으나, 이를 믿고 귀순한 주민들은 제주항 부근 주정공장 등에 수용됐다가 불법적인 재판을 통해 다른 지방 형무소로 이송됐다. 누구도 이들에게 죄명이나 형량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들은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자신들의 죄명과 형량을 알게 됐다.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명과 1948~1949년 두 차례의 군법회의 수형자 2350명 등 2550명 가운데 대부분은 두 번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한국전쟁 직후 행방불명됐다. 살아남은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 ‘빨갱이 자손’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재단 쪽은 추가진상조사 과정에서 읍·면별 행정리 단위로 마을별 희생자 전수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수형 생활 중 병사·옥사했지만 주검을 인도받지 못하거나, 군법회의 사형수로 총살돼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 사망 소식을 들었지만 주검을 확인하지 못한 경우 등 다수의 행불인이 사망자로 처리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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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행불인은 지난 2003년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당시 3171명이었으나 희생자 및 유족을 추가 접수한 결과 지난해 말 기준 3610명으로 늘었다. 또 재단이 추가진상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는 행불인 숫자가 4255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다른 지방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2073명을 제외한 1877명(기타 행불 305명 제외) 이상은 제주도내에서 행방불명된 것으로 집계됐다.

유형별로는 토벌대에 끌려간 뒤 행방불명된 경우 1022명, 무장대에 끌려간 뒤 행방불명된 경우가 170명이고, 나머지는 사형수 행불인 188명, 예비검속 행불인 497명 등이다.

조정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 차장(현 기념사업팀장)은 “4·3 수형인들이 애초 형무소에서 이감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수형인명부에 나온 수형 장소와 행방불명된 장소가 다른 사례가 상당수 나타났다. 이번 추가진상조사 결과 사망자로 신고됐지만 행방불명된 사례가 상당수 나오는 등 행방불명 실태가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전체 행불인은 5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무소 재소자명부나 국가기록원의 수형 기록 등을 통해 행불인들의 행적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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