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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ESC] 나스카 사막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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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효의 지구둘레길

밤의 사막은 낮과는 다른 세계

동행한 무녀의 의식은 신비로워

이카와 나스카 사이 특이한 지상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외계 우주선과 소통하려던 나스카인의 그림편지일까

비행기 발명 전엔 인류가 몰랐던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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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모였으면 이제 사막으로 가자!” 엘톤이 말했다. 샤먼인 그의 여친이 앞장을 서고 칠레 출신의 소설가, 히피 커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청년, 그리고 내가 뒤를 따랐다. 오아시스를 둘러싼 호스텔, 술집, 식당의 불빛을 벗어나자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밤의 사막은 낮의 풍경과 전혀 다른 세계였다. 달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난 사막의 굴곡은 대지의 여신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시간가량 모래사막을 걸어 목적지에 닿았다. 사발처럼 한가운데가 마냥 옴폭 파인 장소라 사방 어디서도 보이지 않을 듯했다. 엘톤의 여친이 천 가방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이고 모래 위에 꽂았다. 보랏빛 불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연기에서 독특한 향이 났다. 엘톤이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불타는 향나무 옆에 내려놓았다. ‘저 안에 선인장을 달인 약이 들어 있겠구나!’ 사막의 밤, 야릇한 냄새, 신비한 분위기 때문일까? 산페드로를 마신 것도 아닌데 시각, 청각, 후각이 뒤섞인 세계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무녀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정적.

세인들에게 ‘정적’으로 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 카브레라 박사가 그랬던 것처럼.(ESC 3월5일치 참조)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카의 돌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베링해협을 넘기 전 아메리카에선 이미 고대문명이 발생하고 소멸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기존 학설을 뒤흔드는 박사의 주장을 세인들은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재물에 눈먼 농부에게 사기를 당한 멍청한 박사’라고 놀렸다. 의혹을 해명하고, 가설을 증명하고, 마음을 추스르느라 세월을 보내던 그는 결국 입을 닫고 이카의 돌을 발견한 동굴을 메워버렸다. 황당하게만 들릴 경험담을 세세히 늘어놓는 것보다는 입을 다무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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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우와카치나를 떠나기 전, 다시 모래언덕을 올랐다. 산페드로 의식을 치른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간밤에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것처럼. 사막에서 발자취를 지우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해버린다. 사막은 폭설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장소 같다. 눈발의 이름은, 시간이다.

이카와 나스카, 두 도시 사이에 나스카 지상화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고 했다. 나는 나스카로 가던 도중 버스에서 내렸다. 함께 내린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열기로 가득한 사막 저편에 전망대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뙤약볕 사이를 10분가량 걸은 뒤 전망대 아래 도착했다. 관람객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단체관광버스가 오가지 않는 시간대의 나스카 전망대는 텅 빈 사막에 찍힌 한 점에 불과했다. 전망대 꼭대기에서 둘러보니 500m가량 떨어진 언덕 경사면에 사람 형상을 한 지상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파라카스 가족’으로 알려져 있지만 두 발로 서 있다는 특징을 제외하면 신체 비율도, 머리의 형태도 보통의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가 저런 그림들을 그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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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문화유산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나스카 지상화는 수백미터에 이르는 그림부터 1㎞가 넘는 선까지 다양하다. 2019년께 새로 발견된 143개의 그림을 포함, 서울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땅 위에 300개 넘는 그림과 선이 그려져 있다. 20세기 초 나스카 지상화를 발견한 후 인류는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연구했고, 여러 가설을 내놓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지상화를 그렸는가? 질문 중 풀린 건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까지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1500년 전 파라카스와 나스카 문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짙은 색을 띠는 겉흙을 걷어내 옅은 색을 띠는 속흙이 드러나도록 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나스카 지상화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쏟은 마리아 라이헤 박사는 지상화가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가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별자리와 무관한 그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사의 주장 외에도 숱한 가설이 난무했다. 토지소유권 표시라는 주장부터 외계인의 착륙장이라는 설까지. 여러 가설에 나도 하나 보탠다면, 지상화는 나스카인이 쓴 ‘편지’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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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일 앞에서 인간은 가장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라스코 동굴벽화, 알타미라 동굴벽화 등 인류는 그동안 수많은 선사시대 그림을 발견했고, 현재도 인간은 그림을 그린다. 모든 그림엔 공통점이 있다. ‘보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 나스카 지상화의 캔버스는 사막 평원이고, 길이 285m에 이르는 펠리컨 그림의 경우 1㎞ 이상 상공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인류가 나스카 지상화를 제대로 보게 된 시기는 비행기를 발명한 후였고, 거대한 지상화를 ‘보는 이’는 상공에 있어야 한다.

9년 전 유에프오(UFO)를 목격했다는 러시아인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소련으로 불리던 시절 태어난 사람답게 유물론자였던 이고르는 형과 함께 떠난 알타이 여행 이후 미지의 세계에 눈을 떴다. 오지 트레킹을 즐기던 형제는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길 없는 알타이 산맥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전망 좋은 절벽 앞에 형제가 나란히 섰다. 그리고 주변 경치를 둘러보려던 찰나, 눈앞에 비행 물체가 불쑥 나타났다. 궤적을 그리며 날아온 게 아니었다. 날개도 없이 원통형 파이프 형태로 둥근 창이 나 있었다. 비행 물체는 점프를 하듯 다른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하더니 자취를 감췄다. 이고르가 정신을 차리고 처음 본 건, 멍한 눈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형의 얼굴이었다. 이고르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나로부터 얻을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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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비롯해 인적 없는 땅이 도처에 널린 남아메리카는 유에프오 목격자가 유난히 많은 대륙이다. 현존 최고의 에스에프(SF)작가로 꼽히는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다. <컨택트>(원제 Arrival). 지구 궤도에 외계 우주선이 출현하고, 외계 생명체와 의사소통하려는 미 공군이 언어학 박사 루이스를 찾으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닐 블롬캠프 감독의 <디스트릭트 9>에선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불시착한 초대형 우주선이 등장한다. 외계 우주선이 3개월간 미동도 하지 않자 남아공 정부는 강제진입 결정을 내리고, 특수부대원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외계 우주선에 접근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2000년 전 <컨택트>나 <디스트릭트9>처럼 나스카 상공에 불시착한 유에프오가 있었다면, 비행체가 없는 당시의 인류는 지상화로 외계 생명체와 의사소통을 시도했을 것이다. 황당한 얘기 같지만, 1972년 지구 밖으로 날아간 파이어니어 10호에도 외계 생명체에게 띄우는 그림편지가 들어 있다. 지적생명체가 해독하길 바라며 칼 세이건이 구상하고, 린다 세이건이 금속판에 새긴 그림을 문자로 풀면 다음과 같다.

“안녕. 우리는 남녀로 나뉘고, 두 발과 두 다리가 있고, 키는 대략 170㎝ 정도야. 우리는 은하계 중심에서 2만6천광년 떨어진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에서 살아. 답장을 부탁해. 지구에서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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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인류가 현대 과학을 기반으로 지구의 위치, 인간의 형상, 평균 키 등을 유추할 수 있는 그림을 외계로 띄워 보낸 것처럼 나스카 지상화는 상공에 떠 있는 외계 우주선과 소통하려던 나스카인의 그림편지가 아니었을까? 나스카 지상화를 해독하면 파이어니어 10호에 실린 편지와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녕. 나는 두 발과 두 다리가 있고. 이렇게 생겼어. 하늘에 떠 있는 너는 새니? 제자리에서 날 수 있는 건 벌새고, 가장 큰 새는 콘도르인데 넌 대체 어떤 새니? 고래가 사는 바다에서 왔니? 원숭이가 사는 밀림에서 왔니? 망고나무에서 나는 열매는 맛있어. 어떤 맛인지 궁금하면 내려와.” 나스카 지상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론 사람, 벌새, 콘도르, 고래, 원숭이, 나무 등이 있다.

지상화를 감상한 후, 나는 다시 고속도로로 걸어 나왔다. 이카에서 100㎞, 나스카에서 40㎞가량 떨어진 지점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객처럼 작정하면 못 걸을 것도 없지만 모든 생명체를 바싹 말려버리는 사막에서 도보여행은 무리였다. 지평선 너머에서 차량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움직이는 물체가 길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파이오니아 10호에 실린 그림처럼, 미지의 상대가 메시지(다음 도시까지 태워줄래)를 알아채길 바라며 하나의 기호를 허공에 그렸다. 주먹 쥔 손을 길 위로 내민 후, 엄지척!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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