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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에드워드 호퍼 그림 속 인물들처럼… 아무 데도 못 가는 게 아니라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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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 그림(의 인물)이다.” 미국 작가 마이클 티저랜드는 지난 3월7일 이 글을 트위터에 올리며 호퍼(1882~1967) 그림 4점을 첨부했다. ‘Office in small city’(1953), ‘Sunlights in Cafeteria’(1958), ‘New York Office’(1962), ‘Intermission’(1963)의 인물은 식당 테이블이나 극장 객석, 사무실 의자에 홀로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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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Sheridan Theatre’(1937) newmark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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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Automat’(1927)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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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 그림이 다시 ‘밈’이 된 코로나 시대, 봄날의 경이가 우리를 유혹한다…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할 수 있다면 ‘집콕’이 최선이지만 재밌게 지내는 것도 하루이틀…

요리나 독서에 빠져드는 ‘내적 여행’을 떠나거나 “아무 데도 가지 않기” 같은 거리 두기는 어떨까


현대인의 고립과 단절, 공허나 고독, 슬픔과 상실…. 호퍼 그림에 관한 가장 흔한 해석은 코로나19 사태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나 격리에 들어간 상황에 맞아떨어져 보인다. 호퍼 그림은 이 불안한 시대의 근무, 식사, 관람을 표현하는 듯하다. 거리 두기를 한 채 바라보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을 적극 대입한 채 녹아드는 그림이 됐다.

‘Early sunday morning’(1930)은 미국 대공황기 쓸쓸한 거리와 문 닫힌 가게를, ‘Sun on prospect street’(1934)는 미 매사추세츠 글로스터의 적막한 주택가를 그려냈다. 이 바깥 풍경도 지금 여기 여러 곳에 부합한다.

이 글은 8일 현재 7만 리트윗됐다. 호퍼 그림은 이 시대 다시 ‘밈’이 됐다. 영국 가디언은 이 트윗이 소셜미디어에서 ‘바이럴(virul)’을 탄 뒤 ‘호퍼는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의 작가인가’ 같은 비평 기사를 내보냈다. 호퍼 그림과 사회현상을 연결 짓는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1995년 8월 새 과학인 진화심리학이 스트레스, 불안, 우울 같은 현대병의 근원을 찾아낸다는 내용의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내보내며 호퍼의 ‘Automat’를 표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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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Office in a Small City’(1953) wiki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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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Intermission’(1963) wiki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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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와중 성큼 와버린 봄날로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사람들은 자연의 순환을,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봄꽃과 산들바람은 여느 해보다 더 유혹적이다. 실내에 머물며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던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 봄날의 경이를 만끽하고 싶어한다.

1월20일 한국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오고 80일이 지났다. 해외 여러 나라와 언론이 한국의 방역을 칭송한다 한다. 하루 신규 확진자 수는 50명대 이하로 내려갔다. 몇몇 유력 정치인들의 유세 현장 밀집도는 출퇴근 시간대 전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시그널 때문일까. 물리적 거리 두기 준수의 심리적 마지노선은 흔들린다.

1차 거리 두기 종료 하루 전날인 4일 풍경은 이러한 심리적 사태를 드러낸다. 호퍼 그림은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로 바뀐다. 화사한 옷차림으로 섬에 놀러 나온 파리 시민들을 점묘로 그려낸 인상주의 작품 말이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의 풍경도 겹친다. 호퍼 그림은 한편으론 거리 두기와 격리 방법을 담은 그림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대비가 가능하다.

방역당국은 SKT 이동량 분석 결과 4일 현재 이동량이 최저점을 기록한 2월24일~3월1일 기간 평균보다 30%가량 늘었다고 전했다. 이날 사람들은 한강과 남산 등지로 몰려갔다. SNS ‘사회적거리두기실패 #(해시태그)’엔 꽃들이 만발했다.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을 찾은 시민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다. 경향신문 사진부가 5일 윤중로 주변 한강시민공원을 조감해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돗자리 간 간격은 최단 3~4m였다. 이격거리는 한강 주변 편의점에서, 화장실에서 무너진다.

집단감염 위험은 곳곳에서 도사린다. 지난 8일엔 서울 강남 대형 룸살롱에서 확진자가 나왔다고 방역당국이 전했다. 확진자가 근무한 날 500여명의 남성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정부는 오는 19일까지 거리 두기를 연장하겠다고 했다. 전문가와 방역당국의 방침을 존중한다면 지금은 좀 더 인내해야 할 때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당신이 지겨워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걸 상관하지 않는다.” 미국 일리노이 주지사 J B 프리츠커가 지난달 26일 시카고 시장 로리 라이트풋에게 리버워크 폐쇄를 촉구하면서 한 이 말은 지금 세계 모든 곳에서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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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인 지난 5일 한강시민공원 을 찾은 시민들이 잔디밭에 앉아 쉬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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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가능하다면 다시 ‘집콕’(집 안에 콕 박혀서 지냄)해야 한다. 집콕은 가장 확실한 예방 수칙이다. 집에서 무엇을 하는가. 한 호텔이 내건 집콕 노하우 이벤트엔 ‘유튜브 보기’ ‘미드 정주행’ ‘밀린 TV프로그램 보기’ ‘웹툰 보기’ ‘보드게임 하기’ ‘고스톱 치기’ ‘치맥 먹기’ 같은 행위가 나온다. 주로 보고, 먹고, 마시고, 놀기다.

재미난 일도 하루이틀이다. 지속되면 지루한 일이 된다. 최신 화제작 <타이거 킹 무법지대>나 <필 굿>까지 봐 더 볼 게 없다면 넷플릭스 시청 자체가 목표가 된다. 추천작을 검색하고, 시청하다 흥미를 못 느끼면 중단한 뒤 다른 프로그램을 찾는다. 보고, 먹고, 노는 행위들은 한계가 분명하다.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곤 한다.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우주비행사 스콧 켈리는 최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코로나19 시대 자가격리의 팁을 전했다. 그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 520일을 머물렀다. 켈리는 정거장에 책을 가져갔다. 그는 (알림이 뜨곤 하는 전자책이 아니라) 물리적 책에서 평온과 몰입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스케줄을 지켜라’ ‘페이스를 유지하라’ ‘가족, 친구와 연락하라’ ‘일기를 써라’ ‘우리는 연결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도 조언했다.

박한선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모든 사람들을 억지로 격리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거리 두기가 근원적 해결책은 아니라고 본다. 거리 두기는 이론적으로 전 세계인이 2주 동안 집에서 꼼짝 않고 지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거리 두기가 불필요하다고 보진 않는다. 그는 내적 여행을 떠나라고 권유했다. “요리나 독서에 빠져드는 거지요. 그 안에 거대한 세계가 있어요. (거리 두기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면) 유일한 방법이죠.” 그는 “독서가 제일 좋은 것 같다”며 카뮈의 <페스트>를 권했다. “모두가 코로나19에 걸리든 안 걸리든 죽을 수밖에 없어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실존적 상황을 되새기면 삶의 태도를 들여다보며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거죠.”

거리 두기와 내적 여행의 방법론을 활용할 만한 책도 있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로는 1790년 한 장교와 법으로 금지된 결투를 한 죄로 42일간 가택 구금에 들어간다. 그는 의자나 침대, 그림 같은 방안의 사물과 그 사물이 불러낸 기억에 다시 집중한다. 그렇게 써내려간 게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이다.

여행작가 피코 아이어의 <여행하지 않을 자유>(문학동네) 원제는 ‘The art of stillness’(고요의 기술)이다. 책의 핵심 아이디어인 ‘아무 데도 가지 않기’(going nowhere)란, “세상의 소음과 단절하고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시간과 에너지를 찾아내는 한 가지 길” “세상에 등을 돌리고 집 안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서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보고 더 깊이 사랑하려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는 “ ‘아무 데나 가지 않기’로 여행을 떠나면 사랑에 빠진 것처럼 정신이 각성하고, 생기가 넘치고, 심장이 세차게 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여행이 주는 심오한 축복”이라고도 했다.

이 ‘집콕’은 좀 더 고차원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것은 좌선의 기술로 “머리를 비우고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일”이자 “고요를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다.좌선과 명상? ‘기억이나 상상, 추측이나 해석 같은 삶의 상당 부분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념과 잡념을 떨쳐내는 수행을 쉬이 할 순 없지 않은가. 아이어는 손쉽게 툭 던져 말한다. “ ‘아무 데도 가지 않기’야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매일 아침 30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된다.”

“샌타바버라에 살면서 전 세계를 여행하는 남자 여행작가야 잠시 일에서 손을 떼고 여유를 찾으라 말하기 쉽겠죠.” 아이어는 워킹맘의 반론도 소개하며 “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에게 꼭 휴식 시간을 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음’과 ‘아무 데도 못 감’의 간극은 크다. 한국의 학부모들은 개학 연기로 비상이 걸렸다. 30분 틈을 내기 힘든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지난 7일 퇴근시간대 청량리역에서 목격한 경의중앙선 전철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생계와 생존을 위해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대안은 보이지 않았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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