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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저 오늘 생일이다요?” “이거 꼭 먹으세요”…어른들 눈치보며 말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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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어린이에게 하는 존댓말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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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교실을 열기 위해 나는 거의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책장에는 동화책과 그림책들이 보기 좋게 꽂혀 있었다. 십수년간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면서 까다롭게 모아온 책들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내가 제일 의지하는 자산이었다. 고객을 맞이할 때 틀 음악을 골랐고, 대접할 다과도 종류별로 갖추었다. 응대할 순서와 동선 등도 여러 차례 점검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작가와의 만남’이나 공개 세미나를 준비한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수업 내용에도 자신이 있었다. 고객의 상황과 관심, 요구에 따라 추천할 책의 목록이 있었고 함께할 활동도 충분히 준비해두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되었다. 과연 고객인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그때까지 내가 만나온 어린이는 대부분 책 속에 있었다. 나는 그 어린이들을 좋아했지만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다. 조카들이나 친구네 자녀들과 종종 만났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관계였으므로 업무에는 참조하지 않기로 했다. 대학 때 성당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로 어린이들을 만난 경험을 떠올렸지만 너무 옛날 일이라 자료로 쓸 수 없었다. 나는 어린이를 잘 몰랐다. 그건 독서교실을 준비하면서 애초에 인정했던 점이고 그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는 않고 있었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잘 알고, 어쨌든 편집자가 작가 대하듯이 하면 큰 실수는 하지 않겠거니 생각했다. 첫 상담을 앞두고 인사말을 고를 때에야 퍼뜩 이 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어린이에게 처음에 뭐라고 인사하지? “안녕하세요?”인가, “안녕?”인가.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일단 업무상의 만남이라는 점. 나는 일터로서 독서교실을 차렸다. 어린이는 내게 의뢰를 하러 찾아온 사람이다. 적절한 책을 추천하고 잘 읽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게 의뢰의 내용이다. 나는 그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다. 한마디로 우리는 서로에게 볼일이 있는 사이다. 나에게는 학교 선생님의 권위나 아우라가 없었다. 오히려 어린이가 어려운 처지니 존댓말을 쓰는 게 옳았다.

존댓말로는 뽐내기도, 맛있는 걸 먹이겠단 의지도 잘 표현되지 않는다

“애들을 위해 말을 가린다”고 하는데 어린이야말로 말조심을 한다

나는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존댓말을 써보면 어린이는 긴장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 한다

어떤 어린이는 내 인사에 야구모자를 살짝 들어올리며 답하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는 초면이었다. 불쑥 반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나이는 많다. 어떤 어린이에게는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을 것이다. 음, 하지만 나는 초보 편집자 시절 어떤 행사 뒤풀이에서 처음 본, 아마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중년 남성이 “소영씨 우리 딸 또래니까 말 놓을게”라고 해서 다급히 “안됩니다”라고 말했던 사람 아닌가. 안될 일이다. 그럼 친해진 다음에는 되나?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업무상의 관계니까.

그에 비해 반말을 써야 하는 이유는 석연치 않았다. 존댓말을 쓰면 분위기가 어색할 수 있다는 정도? “○○○ 어린이 안녕하세요. 이번주 책 어떠셨나요? 어려운 낱말 골라 보셨나요?” 이러면 나는 괜찮은데 아무래도 친해지기가 좀 어렵지 않을까? 역시 친해지려면 반말을 써야 하는가. 가만, 이건 어디서 많이 들었고 들을 때마다 불쾌했던 말 같은데. 그것 말고 다른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없었다.

내 생각은 나와 어린이가 서로 말을 놓는 데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대안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어린이한테 나를 별명으로 부르게 하고 서로 반말로 대화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그러자 금방 마음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만큼 열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린이가 나한테 반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어린이가 나를 보면서 “안녕, 고사리? 이번 책은 좀 지루했어. 웃긴 책을 골라달랬더니 어떻게 된 거야? 지금 나 두꺼운 책 읽게 하려고 이러는 거지?”라고 따지거나 “근데 고사리는 토론을 하기로 해놓고 왜 자꾸 우기기만 해?”라고 지적하면 어떡하지? 나는 그런 대화를 감당할 그릇이 못 되었다. 무엇보다 나도 ‘권위’를 조금은 가지고 싶었다. 권위 없이 수업을 진행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는 반말을, 어린이는 존댓말을 쓰는 일반적인 관계를 선택했다. ‘나는 고객에게 반말을 하고, 고객은 나에게 존댓말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설정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린이들은 이 설정에 익숙한 듯했다. 열을 올려 말할 때나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을 때 나를 “이모!”나 “엄마!”라고 부르는 어린이는 심심찮게 있어도, 무심결에라도 반말을 쓰는 어린이는 없었다. 마치 존댓말이 몸에 밴 사람들처럼.

그런데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듣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수업 시간 말고 차를 마시는 시간, 그러니까 일상을 나누는 순간에 이따금 존댓말의 한계가 드러났다. 존댓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나 분위기가 있었다.

이를테면 존댓말로는 마음껏 자랑하기가 어렵다. 내용은 전달할 수 있지만 자랑의 핵심인 ‘뽐내는 기분’을 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느 날 주완이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선생님, 저 오늘 생일이다요?”라고 말했을 때 처음 알았다. 반말이라면 “나 오늘 생일이다?” 했을 게 분명하다. 그에 비하면 존댓말 “저 오늘 생일이에요”는 얼마나 맥 빠지는 문장인가.(소리 내어 두 문장을 말해보시길.) 비슷한 예로 송년 수업 때 반짝이 스커트를 입은 내게 지은이가 한 말 “선생님 멋있으시다요!”가 있다. 감탄을 표현하기엔 “선생님 멋있다!” 쪽이 더 강렬하지 않았을까. 칭찬 받는 처지에서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한번은 길에서 하윤이와 마주쳐서 반갑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헤어질 때 하윤이는 손을 배꼽 앞에 모으고 허리를 접어 인사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일 만납시다!” 90도 인사와 청유형 문장이 조합이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알게 되었다. 반말 하는 사이였다면 아마 “내일 만나!”라고 했겠지. 역시 그쪽이 더 좋은 것 같다. 존댓말로는 명령하기도 어렵다. 규민이가 과자를 줄 때 잘하는 말, “이거 꼭 먹으세요”는 어떤가. “드세요”보다 “먹어”가 훨씬 강력한 요구다. 상대에게 맛있는 걸 꼭 먹이겠다는 굳은 의지는 존댓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규민이의 “먹으세요”가 너무 좋다.

어른들 사이에도 한쪽은 반말을 쓰고 한쪽은 존댓말을 쓰는 상황이 펼쳐질 때가 있다. 상사와 부하직원, 시어머니와 며느리, 선배와 후배처럼. 이들의 대화에서 감정을 편하게,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반말을 하는 쪽이다. “생일이다?”의 물음표 부분에 해당하는 ‘분위기’도 반말을 하는 쪽은 전달할 수 있다. 존댓말을 하는 쪽은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가 표현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대응한다. 인류학자 김현경이 “존비법의 체계는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굴러가는 데 필요한 감정노동을 ‘아랫사람’ 몫으로 떠넘기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사람, 장소, 환대>)고 지적한 대로다.

어른들은 흔히 “애들을 위해서 말을 가린다”고 하는데 어린이야말로 말조심을 한다. 존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열을 파악하고 어휘를 고르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다. 경험은 어른보다 적은데 책임은 어른보다 많이 져야 한다. 어린이들이 어른들 보아가며 말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그리고 반말-존댓말 관계에서는 반말을 하는 쪽이 ‘존댓말을 듣는다’는 이유로 더 권위를 얻는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사람보다 그 말을 듣는 쪽이 더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존댓말하는 사람의 의견은 자주 무시된다. 어린이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만일 어린이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 조절에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말을 들으며 대화가 끝난다. “누가 어른한테 그렇게 말하래?”

나는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서로 존댓말을 쓰고 친한 사이에만 반말을 쓰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는 어린이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겠다고 다짐한다. 어린이가 표현한 것만 듣지 않고, 표현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겠다고. 어린이가 말에 담지 못하는 감정과 분위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어른이 되겠다고.

관대한 어린이 고객들 덕분에 나는 편집자에서 독서 선생님으로 무사히 전직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린이 독서에 대한 책도 썼다. 그래서인지 “저도 어린이와 친해지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주변에 어린이가 없어서 어린이를 잘 몰라요”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그러면 나도 여전히 어린이가 어렵다고 솔직히 대답한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는 데서 시작해보라고 권한다. 이웃 어린이와 마주쳤을 때, 조카의 친구를 소개받았을 때, 어쩌다 어린이 친구를 사귀는 행운을 얻었을 때 꼭 존댓말로 관계를 시작하라고. 말을 놓는 게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철없는 어른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때의 기분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나는 어린이 고객에게 존댓말을 듣는 대신, 낯선 어린이에게는 상황 불문하고 존댓말을 쓴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하지 않을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귀여워도 계속 바라보거나 어르는 말투를 쓰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윗집 어린이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마트 무빙워크에서 장난치는 어린이를 보면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위험해요! 다쳐요!” 존댓말로 제지한다. 문을 붙잡아준 어린이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반대 상황에서 고맙다고 하는 어린이에게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강연장에 어머니와 함께 온 어린이에게 인사를 받으면 “실례지만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묻는다.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보면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어른스럽게 들리는지 알게 된다. 의외로 반말을 쓸 때보다 대화의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는 순간, 어른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진짜 권위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회적인 대화를 어린이도 사양하지 않는다. 존댓말을 들은 어린이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더욱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그런 대화가 몸에 밴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다. 어떤 어린이는 내 인사에 야구모자를 살짝 들어올리며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절로 얼굴이 분홍색이 되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한다. 절대로 귀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 안된다. 매번 대단한 자제력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른이니까.

▶필자 소개

경향신문

독서교실에서 어린이와 함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친다. 비양육자로서, 돌봄과 교육의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상이 어른에게도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을 썼다.


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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