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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허연의 책과 지성] n번방 사건과 파스칼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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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7세기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도박의 중독성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파스칼은 "도박꾼이 원하는 것이 정말 돈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그러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파스칼의 논리는 이렇다.

만약 도박꾼이 도박을 통해 따고 싶어 하는 액수의 돈을 그에게 그냥 준다고 치자. 그러면 그는 도박장을 영원히 떠날까. 물론 아니다. 그는 아마도 그 돈을 들고 다시 도박에 뛰어들어 돈을 탕진하고 말 것이다.

도박꾼이 정말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환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돈이라는 구체적 결과물보다 돈을 따는 순간에 느끼게 될 환상과 흥분을 갈망한 것이다. 그런데 환상과 흥분에는 만족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한도 끝도 없이 손에 잡히는 않는 어떤 지점을 향해 달려가며 스스로를 소모할 뿐이다. 결과는 물론 파멸이다.

매트 프래드의 책 '포르노 판타지'는 파스칼의 논리를 등장시켜 '포르노'라는 중독 현상을 진단한다.

요즘 가학 포르노를 유통시킨 'N번방 사건'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프래드는 '일정 정도'의 음란물 유통을 인정하고 방기한 남성 중심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중독에는 '일정 정도'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포르노 중독은 지옥을 위해 달려가는 폭주기차와 다를 바 없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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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라나는 세대가 직면한 포르노 문제는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포르노는 대중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제 포르노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중보건과 정책의 문제다. 포르노가 인간의 두뇌와 사람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되어야 한다."

포르노는 자본과 결탁하면서 더 극악스러워지고 있다. 입장료가 비싸지면 비싸질수록 더욱 가학적인 영상을 제공했다는 'N번방'의 운영 구조가 그 사례다.

책은 이렇게 적고 있다.

"포르노가 지닌 위험성은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데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진을 찍을 때, 그 이미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신비함과 인간성의 깊이를 찬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을 부분으로 구성된 싸구려 상품으로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

호주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중독 연구단체 Integrity Restored의 콘텐츠 담당자인 프래드는 "포르노에 깔린 전제들이 모든 강간 범죄 사례를 장악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모든 포르노의 88%에 물리적·언어적 폭력이 등장한다. 그는 "호주의 포르노 배우보다 할리우드의 스턴트맨이 더 안전한 직업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인류는 섹스의 본질에서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이제 섹스는 폭력과 돈 위에 세워진 병적인 비즈니스가 됐다. '야동'이라는 어이없는 단어를 서슴없이 말하면서 남성의 성욕 해소와 음란물의 존재를 양성화시킨 모든 남자들의 책임이다.

여성을 도구화하고 현실의 사랑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N번방'류의 사건은 인류 존재 가치를 위협하는 또 다른 악성 바이러스다.

프래드는 말한다. "포르노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성기능 장애 환자가 되고 있다"고….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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