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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다도해 손맛에 남도 입말 살려 ‘맛깔난 시집’ 한 상 차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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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등단 5년만에 첫 시집 김옥종 시인

한겨레

이종격투기 선수 출신 요리사인 김옥종 시인이 지난 19일 첫 시집 ‘민어의 노래’를 들고 작품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정대하 기자


시집 속의 전라도 말이 꼬막처럼 쫄깃했다. 제목을 훑다가 가장 먼저 눈에 띈 시가 ‘명태 대그빡 전’이다. 대그빡은 대가리의 전라도 입말이다. 민어·복섬·낙지·꼬막·가오리·준치·홍어·주꾸미·갑오징어 등 남도 해산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19일 오후 광주 신안동 ‘지도로’ 식당에서 만난 김옥종(51) 시인은 “음식을 만들면서 영감을 얻는다. 요리도 시쓰기도 모두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했다. 신안 앞바다의 섬 ‘지도’ 출신인 그는 최근 첫 시집 <민어의 노래>(휴먼앤북스 냄)를 냈다. 2015년 계간지 <시와 경계>의 ‘제14회 신인 우수작품 공모’에 뽑혀 등단한 뒤 5년 만이다.

신안 앞바다 지도 출신 ‘고교 싸움꾼’

건축기사·이종격투기 선수로 활동

20여년 전 어머니 식당 돕다 요리사로

생선 소재 시 지어 ‘사시미 시인’ 명성


“음식도 시도 사람 살리는 일 깨달아”

입소문 ‘민어의 노래’ 베스트셀러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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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종 시인의 첫 시집 <민어의 노래>.


목포에서 고교를 다니던 시절 그는 원래 ‘파이터’였다. 동네 형한테 재미삼아 무에타이를 배운 그는 주먹깨나 쓰고 다녔다. 고교 1학년 때 목포의 유력 폭력조직에 ‘스카웃’ 당했다. 그는 광주의 한 전문대 건축학과를 다니다가 “깡패랑은 더 이상 안 만난다”는 한 여성의 말에 놀라 ‘주먹세계’에서 빠져 나왔다. 첫 직장에선 건축기사로 일하다가 킥복싱 선수가 됐다. 그러다 1995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이종격투기 케이-원 그랑프리 개막전’에 한국의 첫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싸움질’엔 나름 자신이 있었던 그였으나 헤비급 무대에서 1회에 일본 선수한테 케이오패를 당했다. 요즘도 스포츠 전문 채널에선 그 장면이 전설적인 경기로 소개되곤 한다.

킥복싱 도장을 운영하던 그는 문을 닫고 1998년께부터 어머니가 운영하는 백반집 일을 도왔다. 그런데 어느날 단골 손님이 광어 활어를 들고 와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날 회뜨기에 뜻밖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칼 쓰는 일’에 입문했다. 어머니의 요리법을 하나 둘씩 배워 광주 문흥동에서 민어 전문 식당을 차렸다. 그리고 이따금 페이스북에 “음식 재료인 해산물에 대한 생각을 짧은 언어로 표현한 것”을 쓰기 시작했다. 뜻밖에 좋아하는 ’페친’들이 많았다.

음식을 만들며 요리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다. 그는 요리사라면 “적어도 반찬과 김치 외에 장류를 직접 담글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식당엔 62년된 막걸리 식초 다섯통이 있다. 식당을 인수하면서 전 주인한테 받은 것이다. 그는 “막걸리도 음양의 조화에 맞춰 생강과 복분자, 구지뽕을 넣어 빚는다”고 했다. 그가 잘하는 요리 중엔 ‘건정 간국’이라는 게 있다. 건정이란 농어나 민어를 말린 것인데, 새우를 넣고 끓인 간국을 술국으로 먹으면 일품이다. 돼지고기를 조리할 때도 그는 식품첨가물(MSG) 대신 양파즙과 가자미 액젓 등으로 만든 양념장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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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미 시인’으로 불리는 김옥종씨는 광주시 신안동에서 고향의 이름을 딴 식당 ‘지도로’를 운영하며 요리를 소재 삼아 시를 짓고 있다. 사진 정대하 기자


등단을 도운 것은 단골손님이었던 ‘섬나그네’이자 섬연구소 소장인 강제윤 시인이다. 그는 “낯설은 것을 싫어해 신인상 시상식에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시인이 됐다는 게 부담이 됐지만, 등단 이후 다행히 “시심이 터졌다.”

김 시인은 “요리를 하다가 재료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하고 관찰하며 확장하니까 시가 나오더라”고 했다. ‘무덤낙지’라는 시는 어머니가 낙지를 잡으려고 낙지의 숨구멍인 ‘부럿’을 흙으로 봉문처럼 쌓던 풍경을 표현한 것이다. ‘어매의 부럿을 갯벌에서 밟고 나와 버렸다’는 대목에선 회한이 스며 있다.

어느덧 20년 넘게 요리사로 일해 온 그는 “펜이 아니라 도마와 칼로 시를 쓰는 사시미 시인”으로 불린다. (<한겨레> 2015년 10월21일치· www.hani.co.kr/arti/culture/book/713677.html) 그의 첫 시집엔 67편의 시가 정갈하게 올라있다. 강 시인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하응백 문학평론가에게 ‘한번 읽어보라’며 김 시인의 시 묶음을 보냈다. 하 평론가는 “처음엔 큰 기대 없이 훝어봤다. 하지만 웬걸! 그의 시는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그것보다 삶의 근원에 대한 회한이 내면화 되었다”고 평했다. 김 시인은 “출판사에서 ‘무명시인’의 시집을 내 줘 참 감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집은 맛깔나다는 ‘입소문’ 덕분에 주요 인터넷 서점의 시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있다.

이번 시집엔 “첫사랑에 대한 추억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세상과 화해하고 싶은 열린 몸짓이 담겨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 발문을 쓴 강 시인은 “그에게는 요리가 곧 시고 시가 또한 요리다. 그의 시는 맛있고 영양가도 충만하다. 외로움에 기갈 든 영혼들의 뱃속을 든든히 채워주고도 남는다”고 적었다. 그는 식당 안에 작은 책상을 마련해 시집을 쌓아두고 있다. 그 위엔 ‘시가 맘에 안들면 환불해 드려요’라고 적혀 있다.

김 시인은 “식재료의 특성이나 음식의 탄생 배경 등을 설명하면서 시도 있는 요리책을 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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