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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풍부한 조형미·고유의 감수성… 판화의 매력에 빠져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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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판화, 판화, 판화’전 / 김상구 등 60여명 작품 100여점 감상 / 꽃·구름·길 등 여러장의 풍경 목판화 / 바느질해 책으로 묶은 ‘화엄’ 눈길 / “소외된 장르 지속적 관심·공감 기대”

깎고, 긁고, 찍어 이미지를 새긴다. 그 안에는 사람의 숨결과 사유가 깃들어있고, 예술의 본연과 근원이 숨겨져 있다. 판화는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독자적 특징을 지닌 장르이자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로 평가받았지만, 2000년대 이후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특히 유일무이하지 않다는 이유로 회화나 조각 등에 밀려 미술시장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 일쑤고, 컴퓨터를 통해 미술작품을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는 상황도 판화의 고유 가치를 상실케 하는 요소다.

그러나 판화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판화는 여전히 개념을 끝없이 확장해 예술적 실험을 지속하며 현대미술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오는 8월16일까지 선보이는 ‘판화, 판화, 판화’(Prints, Printmaking, Graphic Art) 전은 이 같은 판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판화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데 주력한다.

세계일보

민중 목판화를 대표하는 작가인 홍선웅의 ‘제주 4·3 진혼가’(2018)는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제작한 단색목판화이다.


이번 전시는 소외된 장르를 주목하고 재조명한다는 윤범모 관장의 취임 공약으로 13년 만에 마련된 대규모 기획전이다. 김상구, 김형대, 오윤, 황규백 등 대표 작가들은 물론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젊은 작가들의 최근작까지 만날 수 있다. 이들 60여명의 작품 100여점은 판화 고유의 감수성과 풍부한 조형미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에 다른 매체와 융합하며 확장하고 있는 최근의 실험적 양상까지, 판을 토대로 구축해온 작가들의 장구한 예술적 성과와 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시대나 작업 방식 등으로 묶지 않고, 판화가 있어왔고 앞으로 나아갈 장소를 따와 ‘책방’ ‘거리’ ‘작업실’ ‘플랫폼’이라는 4가지 구성으로 열린다.

세계일보

강행복의 ‘화엄’(2019)은 20권의 아티스트 북을 이어 붙여 설치미술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작품과 하나의 책으로 제본해 아티스트 북 형식으로 제작한 두 가지 형식을 지닌다. 작가는 판화의 과정을 마친 뒤 산사에 들어가 바느질로 제본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파편으로 흩어져있던 수많은 이미지와 형태, 기억 등이 하나로 모이고 엮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인쇄문화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책방’에선 판화로 제작된 아티스트 북을 비롯해 인쇄문화와 판화의 관계를 나타낸 작품들이 전시된다. 강행복의 ‘화엄’(2019)은 꽃과 나무, 구름, 길 등 주변 풍경을 목판화로 찍어낸 뒤 바느질로 하나의 책으로 묶었다. ‘거리’에서는 사회적인 이슈와 판화의 만남을 통해 예술이 일종의 미디어로 기능했던 작품들을 선보인다. 부조리한 현실은 물론 일상의 친숙함, 소박함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풍경들을 담아낸 오윤·김억·김준권·류연복·홍성담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세계일보

50여년간 동판화 작업을 이어온 이영애의 ‘내 날개 아래 바람 1’(1995). 애쿼틴트는 동판화의 일종으로 동판을 부식시켜 요철을 만드는 에칭 기법 중 하나인 애쿼틴트 기법의 특징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세계일보

임영길의 ‘기호풍경-신의주’(2017). ‘한국의 기호풍경’ 시리즈 중 하나로, 한반도의 산과 강부터 도로와 건물, 하늘의 별자리와 지역과 관련된 조류까지 각 지역의 특징을 담아낸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판화는 예술적 창의성과 기술적 숙련도를 동시에 요구하는 만큼 작가들은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표현하고 확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양한 판화의 기법을 연구하고 발전시킨다. ‘작업실’에서는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이영애의 애쿼틴트 작업 ‘내 날개 아래 바람 1’을 비롯해 임영길·남천우·윤명로·서승원·송번수·이윤엽 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세계일보

김인영의 ‘매끄러운 막’(2019)은 투명한 아크릴판 위에 판화 기법 중 하나인 수전사와 스캐노그라피를 사용해 제작했다.


마주치고 연결하고 펼쳐지는 장소인 ‘플랫폼’에서는 판화로부터 출발해 드로잉, 설치미술, 조각으로 이어진 작품들이 있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들로, 우리가 생각하던 판화의 개념을 깨뜨리는 작품들이다. 복제성 없이 식탁보에 실크스크린으로 걸레에서 번진 것처럼 얼룩을 낸 김구림의 ‘걸레’(1974), 돌에 스텐실 기법으로 ‘짱돌’이라는 글자를 새긴 윤동천의 ‘분노’(2017), 투명한 아크릴판에 판화기법의 하나인 수전사와 스캐노그라피를 사용해 만든 김인영의 ‘매끄러운 막’(2019), 판화로 복제한 인물들을 바닥에 줄 세운 김영훈의 ‘무엇이 진실인가?’(2020) 등은 판화의 실험성과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 ‘판화, 판화, 판화’전을 통해 한국 판화가 지닌 가치를 재확인하고, 소외 장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가능성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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