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근대 개인 먼저 체득” 소설사에 끼친 여성 영향력 강조
소설의 정치사: 섹슈얼리티, 젠더, 소설
낸시 암스트롱 지음, 오봉희·이명호 옮김/그린비·2만9000원
에밀리 브론테 원작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 사진. 카야 스코델라리오 주연,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 20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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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에선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글쓰기가 시작됐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이 역사를 다시 쓴다면 “십자군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18세기에 중산층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다룰 것”이라고 썼다.
당시 유럽에선 가정을 배경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생활이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가정소설’(家庭小說)이 큰 인기를 모았는데, 서양 근대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파멜라>도 가정소설이다. 1740년 런던의 식자공이었던 사무엘 리처드슨이 쓴 <파멜라>는 대가집 하녀인 파멜라가 그 집 망나니 아들 미스터비(B)를 진실한 편지쓰기로 감화시켜 새 사람을 만든 후 결혼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그려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1813년 첫 출간된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의 1833년 출판본에 수록된 삽화. 그린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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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성작가들이 잇따라 출현해 ‘여성을 주인공으로 여성작가가 쓰고 여성독자가 읽는’ 가정소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오만과 편견>(1813)과 <에마>(1815)의 작가 제인 오스틴, <제인 에어>(1847)와 <셜리>(1849)를 쓴 샬럿 브론테,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 1847)를 집필한 에밀리 브론테, <메리 바턴>(1848)의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 <성직자의 생활>(1857)을 쓴 조지 엘리엇 등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유명 작가들이 이때 탄생했다.
왜 여성들은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일까. 미국 듀크대 영문과 교수인 낸시 암스트롱은 <소설의 정치사: 섹슈얼리티, 젠더, 소설>(이하 <소설의 정치사>)에서 “나는 왜 여성들이 18세기 말에 괜찮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뛰어난 소설가가 되었으며 그 기반 위에서 예술가의 위상을 획득하게 됐는지 설명해주는 영국소설사를 알지 못한다”고 꼬집는다. 기존 문학사 연구자들은 “여성적 감수성은 개인적 관계를 드러내는 데 더 뛰어나며 소설적 영역에서 유리하다”(이언 와트, <소설의 발생>)거나 “여성작가들은 가부장적 기준을 전복하면서 동시에 그에 순응하는 힘든 과정을 수용해왔다”(샌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 <다락방의 미친 여자>)고 설명했으나 ‘여성적 감수성’이 18세기에만 폭발할 리 없고 여성작가들의 가부장적 질서 전복을 위한 시도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으니 ‘왜 하필 18세기인가’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
샬럿 브론테 원작 영화 <제인 에어> 미아 와시코브스카 주연, 캐리 후쿠나가 감독, 20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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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 교수가 1987년에 쓴 <소설의 정치사>가 지난 30여년 간 “대담하고 도발적인 역작”으로 꼽혀온 이유가 여기 있다. 저자는 소설의 발생 자체가 “여성을 매력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17세기부터 인기를 모은 여성용 품행지침서와 18~19세기 가정소설에는 당대가 요구하는 여성적 특성을 체화한 ‘가정여성’(domestic woman)들이 등장한다. 파멜라(리처드슨의 <파멜라>)와 에마(제인 오스틴의 <에마>), 제인(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과 같은 주인공들은 사회적 신분과 육체적 매력을 내세운 귀족여성을 밀어내고 근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제시한 대표적인 ‘가정여성’이다.
근대 여성들에게는 “현명한 지출자이자 취향을 갖춘 소비자의 역할”이 중요했으므로, 근검과 금욕이 필수 덕목이었다. ‘가정화한다’는 것은 난잡하고 불순한, 전근대적이고 귀족적인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다. 가정여성들은 소설에 묘사된 연애와 구혼의 관행을 통해 성을 규제하고 내면의 깊이를 지닌 감정적 도덕적 주체로서의 개인, 즉 근대 개인이다. 암스트롱 교수는 “존 로크와 같은 근대 남성 철학자들이 그려낸 근대 개인의 형상을 만든 것은 여성들이 쓰고 읽던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정치경제 영역을 주도한 부르주아 남성이 아니라, 가정에서 사생활을 주도한 중산계급 여성들이 근대 개인을 먼저 체득했다는 얘기다. 18세기 여성들의 글쓰기는 가정을 정치경제적 공간과 구분되는 도덕적, 감정적 공간으로 만듦으로써 근대 개인의 형성에 기여했다.
여성이 가부장적 역사의 피해자가 아니라 책임 있는 근대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하는 만큼, 저자는 여성들의 글쓰기가 불러온 명과 암을 두루 조명한다. 대표적인 가정소설을 미리 읽었거나 영국문학과 페미니즘 문학비평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독자에겐 훨씬 수월하고 흥미롭게 읽힐 것이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1815년 첫 출간된 제인 오스틴 <에마>의 1909년 출판본 표지. 그린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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