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의 전장에서
토머스 헤이거 지음·노승영 옮김
동아시아 | 472쪽 | 2만2000원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1893년 세상을 떠났다. 사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질 않지만,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가장 유력하다. 그렇다면 아직 항생제가 개발되기 이전이다. 이 책에 따르면 최초의 항생제인 ‘설파제’는 “1930년대 중반을 시작으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잇따라 발견”됐다. 이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균 감염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콜레라는 물론이거니와 폐렴, 페스트, 결핵, 디프테리아, 수막염 등 “일단 세균 감염이 시작되면 지구상의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군인들이 전장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도 세균 감염이었다. 적어도 1차 세계대전 때는 그랬다. 이 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미국 병사들이 세균 감염으로 죽었는데, “그 숫자가 총탄에 죽은 수보다 많았다.” 이를테면 적군의 총검에 약간 찔렸다든가, 포탄 파편에 다리나 팔을 살짝 스친 정도로도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항생제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일단 상처가 감염되면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상처 감염은 더 이상 중요한 의료 사안이 아니었다.” 항생제 덕분이었다.
이 지점에서 항생제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약간 전문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항생제’라는 용어는 두 가지로 정의된다. 엄격하게 정의하자면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이 생산되듯) 항생제는 살아 있는 미생물에서 생산돼야 한다.” 이 정의를 준수하는 일부 전문가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설파제를 항생제로 부르지 않는다. 설파제는 “실험실에서 만든 순전한 합성 화학물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상당수 전문가들은 “해당 성분을 어디서 얻었는가보다는 그 성분이 어떤 일을 하느냐”에 주목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항생제란 “인체에 심한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인체 내의 특정 세균들을 선택적으로 죽일 수 있는 모든 성분”이다. 이 책은 두 번째 정의를 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설파제는 세계 최초의 항생제다.”
책은 ‘최초의 항생제, 설파제는 어떻게 만들어져 인류를 구했나’라는 부제를 지녔다. 설파제의 발견과 개발 과정을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펼쳐놓고 있는 책이다.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균에 맞서 분투했던 여러 의학자들이 주연과 조연으로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독일 의사 게르하르트 도마크(Gerhard Domagk, 1895~1964)가 단연 주인공이다. 저자는 그에게 완전히 매료돼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서문에서 밝힌다.
“키가 크고 깡마른” 도마크는 독일에서 가장 북쪽 도시인 킬(Kiel)에서 의대를 다니다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수류탄 투척병으로, 그다음에는 의대에 다녔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야전병원으로 배속됐다. 1914년 애국 열풍에 휩싸여 입대했던 청년은 이 동부 전선의 야전병원에서 참상과 마주한다. 병원은 숲 한가운데의 농장이었으며 수술실은 헛간이었다. 의사는 적고 물품도 부족했다. 젊은이들의 주검과 감염된 상처로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도마크는 세균이 얼마나 “심술궂고 비겁하게 사람을 살해”하는지를 목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파멸에 맞서겠노라고 신과 나 자신에게 맹세한다.”
그가 바로 설파제의 발명자다. 훗날 노벨상을 받았다. 책은 종종 한 편의 ‘영웅 서사’를 연상시키지만 그렇다고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저자는 도마크를 주인공으로 삼았으나 그의 이야기로만 일관하지 않는다. 세균이 감염병 원인일 수 있다는 파스퇴르의 연구, 디프테리아·결핵·탄저병·폐렴·파상풍·콜레라 등을 일으키는 세균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한 로베르트 코흐 등 많은 의학자들의 이야기가 종횡으로 얽힌다.
설파제의 사용과 유통, 특허권을 둘러싸고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보여줬던 다양한 입장도 드러난다.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이 만든 설파제는 영국에서 대규모 시험 사용을 통해 효능을 인정받았다. 프랑스의 파스퇴르연구소에서는 설파제의 작용 기전을 밝힌다. 미국에서는 각종 ‘카피약’이 판매되다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거의 100년 전 이야기임에도, 코로나19와 전쟁을 치르는 요즘 지구촌의 고민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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