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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무지가 곧 권력” 약자만 눈치채는 가부장제의 질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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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 호스’ 펴낸 작가 강화길

[경향신문]

경향신문

단편소설 ‘음복’으로 올해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소설가 강화길(34)이 그의 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 호스>를 출간했다. 소설에는 홀로 세계의 기이함을 눈치챈 여성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에게 가해지는 교묘한 폭력과 억압을 드러낸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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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이자 며느리의 시선으로
제삿날 풍경 그린 단편 ‘음복’
가족의 권력구조·갈등 드러내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이 단호하고 서늘한 한마디로 소설은 시작된다. 결혼 후 처음 맞는 남편 가족의 제삿날, 화자인 ‘세나’는 집안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단번에 감지한다. 제사가 진행되는 몇시간 안에 이 집안의 갈등의 역사와 숨겨진 비밀, 막후에 진행된 가족 간의 은밀한 협약 같은 것들을 눈치챈다. 이 집에서 수십년을 장손으로 사랑받으며 살아온 남편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느긋하다. 그리고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이 평범한 가족의 관계 뒷면에 있는 차별과 희생에의 강요, 서로에게 품은 뒤틀린 애정과 미움을 알아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소설은 가부장제에서 ‘무지가 곧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아내이자 며느리인 세나의 시선을 통해 드러내 보인다. 재빠르게 눈치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의 ‘앎’과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이들의 ‘모름’. 인지관계의 통상적 권력구조를 역전하며 소설은 평범한 한 가족, 일상적인 제사 풍경을 스릴러의 문법으로 전개한다.

소설가 강화길(34)은 이 소설 ‘음복’을 통해 올해 제11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최근 ‘음복’ 등 단편 7편이 수록된 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 호스>(문학동네)를 출간한 그를 지난 23일 서울 정동에서 만났다.

“ ‘음복’을 발표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을 하시더라고요. ‘음복’의 세계관은 제가 깊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분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이라는 점에 놀랍기도 하고 조금 씁쓸하기도 했어요.” 강 작가는 “ ‘음복’ 속 가족 구성원들은 내 자식은 나와 다르게 살길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며 “가족들이 갖고 있는 각자의 복잡한 역사 때문에 조금씩 뒤틀리는데,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젠더 구조와 맞닿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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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수록작인 ‘가원’은 가족의 내부자인 손녀의 시선으로 이런 구조적 모순을 찾아간다. 손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할머니를 찾아나서며 자신에게 언제나 따뜻한 애정을 보였던 할아버지, 혹독한 양육자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할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소설은 이 두 명을 대비시키며 왜 가족 안에서 많은 여성들이 “비릿한 증오”를 안고 살아가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강 작가는 “ ‘가원’은 제가 쓴 소설 중 가장 사랑이 넘치고 가장 비정한 소설일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강 작가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그로 인한 여성의 불안과 공포를 다양하게 변주한 소설들을 발표해와 ‘한국 여성 스릴러’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작가는 책 속 여성 인물들을 ‘모든 것을 아는 화자’의 자리로 위치시켰다. 홀로 세계의 기이함을 눈치챈 여성들이 등장하며 그들에게 가해지는 교묘한 폭력과 억압을 드러낸다. “보통 스릴러는 결국 사건이 해결되면서 끝나지만 제 소설은 대다수 열린 결말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제가 생각하는 여성의 일상은 그 불안을 누군가 등장해 해결해줄 수 없잖아요. 사건이 해결돼도 불안은 남고요.”

평범한 일상을 스릴러로 전개
“어디에나 있는 여자들 이야기로
어디에도 없는 장르 이뤄” 평가

그의 소설은 거대한 사건이나 범죄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면서도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켜 나간다. 소설가 편혜영은 “강화길은 어디에나 있는 여자들 이야기로 어디에도 없는 장르에 이르렀다”고 평했다. 강 작가는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성 속의 불안에 관심이 있고, 그런 쪽에 제 감각이 더 발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는 자신만의 의미로 세상을 다시 쓰려는 여성의 이야기다. 이제 등단 8년차를 맞아 “신인도 중견도 아닌” 작가의 고민과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강 작가는 미국 컨트리 음악가인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 ‘화이트 호스(White Horse)’를 듣고 난 뒤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한다. 선배 음악가인 밥 딜런의 ‘화이트 호스’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 스위프트는 이 곡에서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다”고 선언한다.

강 작가는 “장편을 발표하고 이런저런 문단의 평가에 신경을 쓰다가, 이 소설을 쓰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 ‘화이트 호스’는 저 자신을 위한 소설이기도 해요.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를 계속 생각해 보는데, 예전엔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도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몰입의 과정, 이 속에서 작가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쓰고 조금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책 말미 ‘작가의 말’에서 강화길은 ‘화이트 호스’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풀었다. “그리하여 이번 소설집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 고리를 끊고, 의미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모든 실패와 모순과 애착이 만드는 희미한 틈새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삶에 대한 이야기.”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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