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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30년 전 선물로 받은 백석 시집…그 한권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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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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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사실 사이의 틈을 상상으로 메꾸며 한 사람의 삶을 문학적으로 복원하는 글쓰기란 어떤 의미일까. 소설가 김연수(50)의 신작은 이런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장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에 김연수 작가가 장편 '일곱 해의 마지막'(문학동네 펴냄)을 출간했다. 동서·동인·대산·황순원·이상문학상을 차례로 거머쥐면서도 인정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글쓰기를 묵묵히 거쳐온 그의 이번 소설은 백석 시인의 '알려진 삶'과 '알려지지 않은 삶'에 관한 이야기다.

왜 백석이었을까. 지난달 30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김연수 소설가를 만났다.

"백석이 해금(解禁)되고 이듬해인 1989년, 백석 시집을 선물 받았다. 당시엔 공산주의에 경도된 시인으로만 알았지만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같은 서정시가 그득했다. 백석이 월북 후에 쓴 글도 이후 공개됐는데 옛 시와 달랐다. 압박을 받아 쓴 건지, 자발적인 시인지의 의혹이었다. 백석이 숙청된 나이인 46세를 지나가면서 '과연 난 어떤 선택을 했을까'란 의문이 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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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경성 모던보이' 백석은 지워지고, 월북 후 백석이 직면했던 절망에 상상의 렌즈를 들이댄다.

주인공 기행(백석 본명)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같은 절창의 시를 써냈다. 월북 후 공산 체제에서의 작시(作詩)는 팍팍했다. 아프리카 기린의 목에 붉은 깃발을 다는 시를 썼다가 '우리나라 곰이나 범을 두고 왜 먼 나라 동물을 끌고 오느냐'며 타박 받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당한 서정시인의 절망, 동조와 침묵 사이에 선 인간 고뇌다.

"싫지만 할 것인가, 아예 안 할 것인가. 오랜 질문이었다. 보통의 인간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선택을 용기라 부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하기 싫은 것을 안 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더 큰 용기일 수 있다. 백석의 용기란 그런 것이었을까."

현실에 덧댄 비현실에서 백석은 소생한다. 1963년 숙청 후 1996년 타계하기까지 침묵했던 시인의 고뇌가 2020년 김연수의 펜 끝에서 소생한다. 김연수는 백석 연구가 송준 글을 탐독했고, 통일부 북한자료실도 오갔다. 스포일러일까 저어되지만 소설 197~198쪽에 이르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백석 시를 외게 된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백석 '사슴' 초판본은 남한에서 고가에 거래됐지만 백석은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사망했다. 해금 전 남한 사람들은 백석을 몰랐고, 북한에선 여전히 환영받지 못한다. 그게 그에게 주어진 현실이었지만 환상의 이야기로 그가 꿈꾼 삶에 대해 얘기해볼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이 소설이 된다고 믿어본다."

'역사 작가'로 김연수를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과거의 빈틈에 상상을 덧대는 방식은 김연수의 오랜 과업이었다. 재현(再現)의 의미를 물었다.

"사건의 인과를 맞춰야 하니 현실에서의 물리학 같다. 완벽한 재현은 아니지만 현실과 비현실 사이, 확정할 수 없는 사실들 사이에서 빈틈에 집중한다. 상상 가능했던 최선의 세계를 만들고 이를 독자와 나눈다. 소설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세계다."

1993년 시(詩) '강화에 대하여'로, 1994년 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각각 등단한 김연수는 26년간 작가로 살았다. 김연수를 이해하는 필독서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에서 그는 쓺의 이유를 '치유'로 답한 바 있다. 읽는 이가 아니라 쓰는 이까지 치유하는 것이 소설이다.

"가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나'라는 게 방해가 될 때가 있다. 30대에는 30대 남성으로서의 선입견이 있기 마련이고 40대에도,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소설가는 '나'를 희미하게 만들어 소설의 화자(話者)를 획득해야 하는데 '나'가 없어질 때까지 '나'를 부정하다 보니 개인이 없어져 치유도 무색해지곤 한다. 어쨌든 그 과정이 '작가 되기'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같은 모국어를 쓰는 온 독자들이 아껴 읽는 유명 작가로서의 삶. 그러나 한바탕 소음을 걷어내면 그에겐 문학적 골방만이 남을 터. 마음속에 있을 '김연수의 골방 풍경'을 물었다.

"나의 골방은 아주 좁지만 모든 걸 다 넣을 수 있는 공간이다. 바깥 세상을 다 불러들이는 자리다. 글에의 탐욕, 모든 걸 다 알고 싶은 욕망 같은 게 내게 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걸 채워넣고 싶다. 그게 소설가의 궁극적 소설이 아닐까."

[김유태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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