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8 (화)

“노인·학생 무료” 복지가 된 버스…공영제 실험에 쏠린 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정선군이 지난 6월1일부터 버스공영제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65살 이상 노인과 초·중·고등학생, 국가유공자, 장애인, 기초수급권자 등 교통약자는 시내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정선군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좋지. 좋다마다. 장 나들이를 공짜로 다녀올 수 있게 됐는데…. 늙은이들이 무슨 돈이 있어.”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덕우리에 사는 박영준(77) 할아버지는 돈을 내지 않고도 버스를 탈 수 있게 됐다는 소식에 활짝 웃었다. 그는 “예전엔 코앞에 있는 오일장에라도 한번 다녀오려면 버스비만 왕복으로 2800원이나 들었어. 이제는 어디든 돈 걱정 없이 갈 수 있게 됐지. 답답할 땐 버스만 타면 친척이나 친구도 마음 놓고 만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어”라며 즐거워했다.

인구 3만7천여명에 불과한 산골 지방자치단체인 강원도 정선군이 지난 6월1일부터 버스공영제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40여년간 민간이 운영하던 시내버스를 정선군이 인수해 직영하는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강원도에서 버스공영제를 도입한 것은 정선군이 처음이다. 전국적으로도 도서 지역인 전남 신안군을 제외하면 내륙 기초지자체 가운데 첫 도전이다.

정선군, 예산 10억원 추가로 큰 변화 버스공영제 도입으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65살 이상 노인과 초·중·고등학생, 국가유공자, 장애인, 기초수급권자 등 교통약자가 시내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까진 최소 1400원(편도 기본요금)에서 많게는 거리에 따라 6200원까지 요금을 내야 했다. 버스공영제 시행으로 무료 혜택을 보게 된 주민은 1만6천여명. 정선군민 10명 가운데 4명이 무료 혜택을 받게 된 셈이다. 교통약자뿐 아니라 일반 주민과 관광객도 1천원만 내면 거리에 상관없이 시내버스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운영 주체가 바뀌며 요금이 낮아진 게 변화의 전부는 아니다. 정선군은 직영으로 바꾸며 그동안 과도한 보조금으로 버티던 비효율적인 노선을 손봤고, 그 결과 버스 노선은 57개에서 54개로 줄었다. 대신 폐지된 노선엔 이용요금 1천원(1인 편도)으로 마을 집결지에서 읍내 거점까지 이동할 수 있는 희망택시를 투입했다. 대신 버스 운용 대수를 22대에서 28대로, 운전기사는 23명에서 50명으로 늘렸다. 김근석 정선군 버스공영제티에프(TF)팀 주무관은 “노선은 줄었지만 운행 횟수는 2배 이상 늘었다. 이전에는 버스 한번 타려면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은 1시간에 1대는 무조건 들어간다”고 말했다.

버스 기사들의 만족도도 높다. 정선에서 24년째 시내버스를 운행 중인 유영준(60)씨는 “평생 버스를 운전했지만 이렇게 공무원 신분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신분이 안정되고 처우가 좋아지다 보니 승객을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모시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반겼다.

한겨레

전남 신안군은 2013년 전국에서 가장 먼저 버스공영제를 도입해 주민들한테 호응을 받고 있다. 신안군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버스공영제 도입에 따른 군의 한해 예산 부담액은 35억원가량이다. 하지만 기존 민영제 시절 지원한 손실보전금 25억원가량을 빼면, 추가 부담액은 1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현봉호 버스공영제티에프팀 주무관은 “노인 인구가 많은 지역 특성상 시내버스를 교통정책이 아니라 복지정책의 하나로 접근하고 있다. 또 버스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왕래가 늘면 지역상권 활성화에도 자연스레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선군의 이런 시도는 버스가 처음이 아니다. 2010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초·중·고 무상급식을 도입했고, 2012년에는 전국 최초로 학교 우유 무상급식을 하는 등 공공성 강화 정책을 앞장서 펼쳐왔다.

신안군, 버스공영제 뒤 승객 3배 늘어 ‘버스공영제의 원조’는 전남 신안군이다. 섬으로만 이뤄진 신안군은 2013년 14개 읍·면에 농어촌버스 37대를 확보해 운영하는 버스공영제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행했다. 초기 보상비로 30억원을 투자했고, 해마다 운영비 22억원을 들였다. 운영인력도 직접 고용했다. 신안군 육상교통팀 이남영씨는 “이전 민영버스는 승객이 적어 결행이 잦았고, 재정을 투여해도 불만이 사라지지 않았다. 군청에서 공영버스를 운영해 노선을 조정하고 배차에 여유를 두면서 한해 승객 수가 시행 이전 20만명에서 67만명으로 3.3배 늘었다”고 말했다.

이런 시도는 주민 편익을 우선하는 노선 설정과 배차시간 등으로 주민들한테 호응을 받고 있다. 신안군 자은면 한운리 이장 성영일(57)씨는 “마을 주민 50여명 가운데 30%는 차가 없어 버스를 이용한다. 제시간에 오고 친절하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장을 보거나 병원 가는 일을 나들이처럼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신안군은 농어촌버스에 이어 여객선에도 전국에서 처음으로 공영제를 도입했다. 최도청 신안군 교통지원과장은 “버스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경제성보다는 공익을 우선해 요금 1천원을 단 한차례도 올리지 않았다. 주민의 교통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자치단체들이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수요응답형’ 공영제 고민한 경기 수도권에서는 경기도가 버스공영제 시범사업을 추진 중이다. 정해진 노선이나 일정 없이, 교통이 불편한 농어촌 지역에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행하는 수요응답형 버스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경기교통공사가 차량 30대를 마련하고 운전기사 60명을 고용하는 공영제 형태로 운영할 방침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이르면 내년 상반기께 공영제 형태의 수요응답형 버스를 운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성남시장 재임 때부터 ‘장기적으로 버스는 공영제로 가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한겨레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서울·경기·강원지역버스지부가 2017년 9월 경기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시민 안전을 위해 버스공영제를 도입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 광주시도 마을버스를 직접 운영하고 운행노선도 자체 결정하는 마을버스 공영제를 추진하고 있다. 버스회사가 자신들이 직영하는 일반버스 노선과 겹치지 않도록 마을버스 노선을 만들어 운용한 탓에 이용자 민원이 잦기 때문이다. 광주시는 오는 9월 마을버스 15대를 구매해 공영제를 시범 도입한 뒤 2022년 하반기까지 버스회사로부터 마을버스 63대를 넘겨받아 노선을 재정비할 계획이다.

대중교통 전반 개선 계기로 이처럼 버스공영제에 대한 지방정부의 관심이 커진 것은 민영이나 준공영제 폐해가 큰 탓이다. 준공영제는 버스 운행을 민간업체에 맡기되 오지·적자 노선 운영에 따른 적자를 지자체가 보전해주는 제도다. 이명박 시장 시절이던 2004년 7월 서울시가 처음 도입한 뒤 현재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일부), 제주, 경기(일부) 등 8개 지자체로 퍼져 시행 중이다.

민영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였지만, ‘버스 재벌’ 양산과 도덕적 해이 등 예산 낭비 문제점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서울시의 경우 재정지원금은 2016년 2771억원, 2017년 2932억원, 2018년 5402억원 등으로 크게 늘었지만 △버스업체 임원들 억대 연봉 잔치 △주유소 이용 등 친인척 일감 몰아주기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공영제 확산의 가장 큰 걸림돌도 예산 부담이다. 2014년 버스공영제를 도입했으나 과도한 재정부담 우려로 ‘천원 버스’로 방향을 튼 전남도가 대표적이다. 전남도는 시내·농어촌버스 운영체계 개편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원점에서 다시 검토에 들어간 셈이다. 이광수 전남도 대중교통팀장은 “버스공영제, 준공영제 등 여러 방안을 검토해 단계적으로 개선하려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확산, 주52시간제 실시와 최저임금 인상 등 계기로 대중교통 운용 전반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고 있다. 강상욱 한국교통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전국 시내버스 대부분이 민영제나 준공영제로 운영되지만 80~90%를 지자체에 의존하면서 사실상 공영제 비슷한 체제로 변질됐다. 민간에 민간다운 역할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같은 음식도 어떤 사람에겐 약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마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지역 맞춤형 공영제 모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신 초기 비용 과다 등 문제가 있는 만큼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박수혁 안관옥 박경만 기자 psh@hani.co.kr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뉴스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