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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전쟁과 성차별주의는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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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페미니즘 국제정치학 입문

베티 리어든 지음, 황미요조 옮김, 정희진 기획/나무연필·2만원

한겨레

독일의 신나치주의자들이 나치의 상징 문양을 그려 넣은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는 과거 모습. <한겨레> 자료


전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날까? 선한 나와 내 소중한 공동체를 위협하는 타자 때문에? 아니면 특권을 유지하려는 권력 의지 때문에?

페미니스트 평화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베티 리어든(91)은 전쟁을 페미니즘의 눈으로 개입한 대표적인 원로학자다. 1985년 미국에서 출간된 그의 주저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는 성차별주의와 전쟁 체제의 뿌리가 하나이며 둘은 모두 폭력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원제는 ‘성차별주의와 전쟁 체제’. 전쟁이 작동하는 핵심 원리에 성차별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전쟁 체제’는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특권 경쟁 속에서 (남성) 엘리트는 자신에 대한 지지가 흔들릴 때 외부의 위협이 있다고 다수를 설득한다. 대중이 질서를 지키도록 하려고 엘리트는 상당 기간 노력과 대량의 자원을 투입하는데, 그것이 전쟁 체제다. 결국, 전쟁이 체제를 낳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전쟁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남녀의 특성을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별하고 위계화하는 ‘성차별주의’는 전쟁 체제의 특정한 성격을 만든다. 리어든의 이론을 종합하면, 사회는 남성에게 통제와 지배의 면허를 주고 공격성을 펼치도록 허락한다.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는 이 폭력은 남성의 “위대한 자질”로서 칭찬되고, 격려되고, 독려되고, 공적인 행동으로까지 여겨진다. “타인에게 폭력을 사용하려는 근본적 의지는 개별 전쟁 행위가 의존하는 바로 그 기반이기도 하다. (…) 공격과 복종은 남녀 관계의 핵심이기도 하다.”

‘강간’은 성차별주의와 전쟁 체제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성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유린 당한 강산’ 같은 은유는 여기서 나온다. 강간은 “복종을 유지하기 위한 기초적 위협 체계”다. 강간이 섹스나 성충동이 아니라 권력 문제라고 본 수전 브라운 밀러는 이를 “남성 모두가 여성 전부를 두려움의 상태에 가둬두는 의식적 위협의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이론을 경유해 리어든은 “성차별주의와 전쟁 체제, 둘 다 타자성을 폭력적으로 활용한다”고 분석했다.

종합하면,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는 인간의 성숙을 전제로 하며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타자를 수용하는 것이기에 고통이 뒤따르며 교육을 필요로 한다. 성별화와 성적 위계가 폭력의 기반이며 특권 체제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그의 분석은 성차별주의가 광범한 전쟁 체제를 지탱하며 사회 체제 또한 다르지 않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계속 전쟁중이었던 것이다.

본문만 따지면 200여쪽, 무겁지 않은 책이지만 내용은 여느 ‘벽돌책’ 못지않다. 지은이는 페미니즘 진영의 성과를 높이 사면서도 구조적 분석이 부족하다며 한계를 지적한다. 압제자의 이미지와 가치를 내면화하여 남성의 성공 기준을 열렬하게 받아들이는 여성들과도 거리를 둔다.

책의 기획·감수·해제를 맡은 여성학자이자 평화학연구자 정희진의 해제는 이 책을 읽는 길잡이가 되거니와 그가 정리한 자료 목록 또한 근사한 심화학습의 길로 독자를 안내한다. 책 뒷부분에 실린 ‘유엔 안보리의 여성평화와 안보를 위한 결의 1325호’ 또한 빼놓지 않고 읽어야 할 부분. 평화 구축을 위한 여성들의 기여와 사상의 급진성에 놀라게 된다. 주류가 아닌 다층적 시선으로 시대의 토대를 재해석하는 ‘메두사의 시선’ 시리즈 1권.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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