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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크리틱] 소설이 왜 필요할까 /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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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영준 ㅣ 열린책들 편집이사

뭐든 끝장이라고 말하면 효과가 좋은 건 사실이다. 그런 발언은 우리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소설 <제5도살장>(1969)에는 독서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평론가가 “이제 소설은 끝났다”고 선언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옆에 앉은 평론가2가 맞장구치듯 말한다. “현대 독자들은 글을 읽고 이를 장면으로 떠올리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 뒤 반세기가 흘렀는데 앞에 나온 것들 중 실제로 죽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5도살장>은 여전히 명작이고, 소설이 끝났다는 선언도, 독자의 정신적 능력에 결함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철마다 반복된다. 늘 마지막 숨이 끊어진 것 같던 독서토론 프로그램조차 슬그머니 다시 나타난다. 사실 평론가2의 말은 편집자가 작가에게 수정을 강요할 때 쓰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건 다른 주제니까 넘어가자.

소설이 정말 죽었는지 따져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라고 한 얘기도 아닐 테니 말이다. 소설의 추락한 위상을 과장해서 한탄한 정도로 이해한다. 나는 지금 소설이 받는 대접이 문제가 된다고 보지 않는다. 소설이 사회에 기여하는 점이 분명치 않은 것, 그래서 사회로부터 받는 보수가 큰지 작은지 모르게 된 것. 이게 더 문제 아닐까.

1970년대 영장류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뜻밖에 침팬지가 상대방의 생각을 고려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게 ‘마음이론’(Theory of Mind)인데, 이론이라고 하니 어렵게 느껴지지만 ‘타인의 생각과 상황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능력’을 그렇게 표현한다. 인간의 기본 탑재 능력 같은데 꼭 그렇진 않다. ‘마음이론’이 결핍된 사람은 예컨대 약속 장소가 바뀌었을 때 상대방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옆에서 아무리 안달을 해도 그 연락을 마지못해, 가능한 한 나중에 하는 사람을 살면서 몇번은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이들에겐 사회적 상호작용이 평생 감당키 힘든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런 능력을 어렸을 때부터 충분히 발달시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약물중독이나 뇌손상, 조현병 등으로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치료나 예방법이 있을까?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소설을 읽는 것이 ‘마음이론’의 유지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타인의 상황과 감정에 일단 공감하는 게 전제되고, 읽기를 마치면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공감을 돌려받게 되니 좋은 훈련이 되는 게 당연할 것이다.

물론 소설마다 효능의 차는 있겠다. 상황과 감정의 양이 그리 균등하게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추리작가 챈들러의 데뷔 시절, 잡지 편집자들은 그의 문학적인 묘사나 대사를 통째로 삭제하곤 했다. “이런 건 우리 독자들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 액션에 집중하시죠.” 이 문제에 확고한 이론을 갖고 있던 챈들러는 뒷날 이렇게 썼다. “독자 스스로 액션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감정, 묘사와 대사가 빚어내는 감정이다. 단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챈들러의 좋은 점은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데 있다. 그것은 독자를 타자화하지 않고 스스로를 ‘진정’ 독자의 입장에 놓아 봤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여기서 몇 마디 더 시켜 봤다면, 예를 들어 왜 독자는 감정을 원할까요라고 물어봤다면, 그는 ‘마음이론’ 비슷한 것을 말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정신건강을 위해, ‘마음이론’을 유지하기 위해 소설을 읽을 수 있다. 한편 ‘감정’을 느끼기 위해 소설을 읽을 수도 있다. 그게 같은 목적이라는 걸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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