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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해방 후 첫 발굴 가야 무덤 ‘은귀걸이 인골’…그는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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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발굴…해방 후 발굴 첫 가야 고분

5~6세기 초 비화가야 최고수장층 무덤

도굴·훼손에 석실 구조 등 여전히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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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1월 창녕 계성고분군 5호분 발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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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마을 뒷산 가야 고분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1967년 9월13일(또는 7일) 계성리 이장은 계창국민학교 교장에게 달려가 마을 뒷산에 있는 계남 북5호분(현재 창녕 계성고분군 5호분)이 도굴된 사실을 신고했다.

가야시대 고분군에 속한 경남 창녕 계성리 고분군 5호분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과 이마니시 류가 처음으로 고분 분포도를 작성하면서 공식적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일제의 고적조사 사업은 식민통치를 뒷받침할 임나일본부설의 학문적 증거를 찾기 위해 진행됐다. 하지만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채 이 사업은 흐지부지됐고, 고적조사과까지 폐지되면서 후속 연구도 중단됐다. 1967년 당시 계성리 주민들은 마을 뒷산에 불룩하게 솟은 봉우리가 가야시대 고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동네 꼬마들은 고분 묏등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았다.

원형을 유지한 고분은 도굴꾼의 표적이 됐다. 계창국민학교 교장과 계성리 이장 등이 현장으로 뛰어갔을 때, 고분은 꼭대기에서부터 깊이 3.7m나 파헤쳐진 상태였다. 교장은 교육장에게, 교육장은 교육감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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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9월 도굴된 창녕 계성고분군 5호분 모습. 도굴꾼이 판 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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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장은 한달가량 고분을 지켜가며 상부 지시를 기다렸지만, 경남도교육위원회는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재도굴을 우려한 교육장은 군수·경찰서장 등과 의논을 거쳐 직접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는 지역 문화재 관리 책임이 교육당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꾼 10명을 고용해 그해 10월11~13일 사흘 동안 깊이 5.6m까지 파 내려갔다. 교육장이 자체 발굴을 결정한 이유는 동네 노인들한테서 “일제 때 다른 고분은 다 손을 댔지만 이 고분은 손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고분 안 유물의 존재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교육장은 발굴을 통해 유물층에 도달하면 직접 문화재관리국에 찾아가 보고할 생각이었지만, 유물층은 발견되지 않았다. 개인 돈으로 발굴을 진행하던 교육장은 결국 발굴을 포기했다.

같은해 11월6일엔 계창국민학교 교장이 일꾼들을 동원해 발굴에 나섰다. 하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교육장과 교장은 무덤 주인의 인골과 유물이 보관된 석실을 찾겠다며 파 내려갔지만, 석실이 있어야 할 위치보다 더 깊이 파 내려갔는데도 석실은 발견되지 않았다. 굴을 파 내려가는 도중 토기 등 유물들이 파손되는 것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발굴 과정에서 나온 유물을 고분 꼭대기 부근에 쌓아두고, 계속 무덤 속을 파 내려갔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발굴은 고분 중심부까지 훼손해 고분의 성격 규명을 어렵게 만들었고, 많은 유물을 파손하거나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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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계성고분군 5호분에서 발굴된 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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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은 1967년 11월7일부터 26일까지 20일 동안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진행한 첫 가야시대 대형 고분 발굴이었지만 학술 목적의 발굴이 아니었다. 첫 도굴과 이를 수습하려고 벌인 두차례 임의 발굴이 불러온 더 큰 피해에 대처하는 응급 대책의 성격이 컸다.

경남도 공공정책연구기관인 경남연구원은 당시 진행된 발굴 결과를 정리한 <창녕 계성고분군 5호분 발굴조사보고서>를 최근 발간했다. 1967년 발굴 뒤 53년 만에야 발굴조사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763쪽(2권)에 이르는 보고서는 1967년 발굴 당시 모습을 찍은 원색도판과 특별논고 등을 담고 있다.

27일 발굴조사보고서를 보면, 보고서는 경남 창녕군 계성면 영취산 능선 끝부분 해발 55~60m 높이의 나지막한 구릉에 있는 대규모 가야고분군을 ‘창녕 계성고분군’으로 지칭한다. 구릉 정상부에 높은 봉분의 무덤(고총) 10여기가 줄지어 있고, 중소형분 261기가 이 고총을 둘러싸고 있다. 계성고분군은 창녕 지역에 있었던 소국인 비화가야의 최고 수장층 묘역으로 비화가야 초기 중심지의 성립과 전개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됐다가, 지난해 2월26일 국가사적 제547호로 승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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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계성고분군 5호분에서 발굴된 은으로 만든 허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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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분은 능선 끝에서 두번째 고총이다. 봉분 크기는 동서 25.5m, 남북 27.7m, 높이 5.5m다. 석실은 봉분 중심에서 서쪽으로 5m가량 치우쳐 있었다. 1967년 교육장과 교장이 봉분 꼭대기에서 중심부를 깊숙이 파 내려갔으나 석실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다.

석실은 길이 7.1m, 폭 2.3m, 높이 2.8m의 주석실과 길이 5.5m, 폭 2.0m, 높이 2.8m의 부석실로 이뤄져 있었다. 인골은 주석실에서 무덤 주인을 포함한 3구, 부석실에서 3구 등 모두 6구가 나왔다. 주석실에서는 금귀걸이, 은 허리띠 등 장신구와 손잡이에 둥근 고리가 있는 칼(환두대도) 2점, 철제 창, 철제 삼지창 등 무기류가 주로 나왔다. 부석실에서는 그릇 뚜껑(개) 69점, 굽 높은 접시(고배) 53점, 목 짧은 항아리(단경호) 37점 등 다양한 토기가 쏟아져 나왔다. 토기류는 가야 전통 양식과 신라 양식이 섞여 있었다.

경남연구원은 계성고분군 5호분이 창녕 지역이 가야에서 신라로 넘어가던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조성된 무덤이며, 인접해 있던 신라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결론 내렸다. 또 무덤 주인은 비화가야의 최고 수장층이 확실하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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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계성고분군 5호분에서 발굴된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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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풀지 못한 의문도 있다.

첫번째 의문은 석실 구조이다. 석실이 횡구식인지 수혈식인지를 두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횡구식 석실은 석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들어, 주검과 부장품을 입구를 통해 석실에 안치한다. 무덤을 만든 뒤에도 필요하면 외부에서 입구를 열고 석실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수혈식 석실은 입구가 없어 석실 위에서 안으로 주검이나 부장품을 안치하고, 석실을 덮는다. 따라서 봉분이 만들어진 뒤에는 봉분을 헐지 않으면 석실에 손을 댈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석실 구조가, 발굴조사보고서가 나왔는데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1967년 도굴과 두차례 무단 발굴이 중심부를 포함한 봉분 내부를 심각하게 훼손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의문은 석실에서 발견된 인골 6구 가운데 무덤 주인을 제외한 5구의 정체다. 2구는 주석실의 무덤 주인 발 아래에서 발견됐다. 3구는 부석실 한쪽에 몰려 있었다. 부석실의 3구는 고급 장신구인 은귀걸이를 착용한 점으로 미뤄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 구조가 횡구식 석실이라면 무덤 주인의 주검이 안치된 이후에 추가로 안치된 무덤 주인의 가족일 수 있다. 하지만 수혈식 석실이라면 무덤 주인과 함께 묻힌 순장자일 가능성이 크다.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는 “발굴조사보고서를 간행했으나, 창녕 계성고분군 5호분과 관련한 의문점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계성고분군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축적될 것이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사진 경남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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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계성고분군의 복원된 현재 모습. 가운데 고분이 5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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