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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성폭력 피해자에서 조력가로 활약 중인 ‘마녀’ [못다 한 이야기- #ME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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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경험에 대한 트리거(트라우마로 발생하는 다양한 신체적·심리적 증상)를 일으키는 모든 종류의 경험을 멀리하고자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 오히려 그 중심부로 뛰어들어 성폭력 재판 현장에 조용하지만 꾸준한 바람을 일으켜 온 인물이 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힘든 싸움을 하며 알아낸 것들을 비슷한 처지의 이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 딱딱히 굳은 사법 시스템의 변화에도 조금씩 기여하고 있는 피해자 지원 활동가 ‘마녀’를 3일 만났다. 성폭력 피해자에서 조력자로 변신하며 흐른 시간만 무려 10년. 담담히 피해자의 곁에서 그들의 말과 시간, 자리를 지켜온 끝에 어느덧 익명의 유명인사가 된 그에게 성범죄 재판, 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피해자의 삶 등에 대해 질문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당하는 ‘마녀사냥’에서 따온 ‘마녀’라는 닉네임으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계속 활동하신 원동력은 무엇이고, 어떠한 심정이신가요?

“시스템 변화에 대한 믿음과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이 그 동력입니다. 시스템은 사람이 운용하고, 그래서 사람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며, (현재 시스템이 가해자, 강자, 다수자를 위해 기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스템은 피해자, 약자, 소수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010년, 혼자서 싸우던 성폭력 피해당사자였던 제게 2020년의 제가 연대자로 곁에 있었다면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건조하고 냉혹한 사법시스템 하에서의 싸움터에 피해자 혼자 두고 싶지 않았고, 다행히 사법시스템 하에서의 싸움을 조력할 능력이 제게 있기에 현재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심정’은 없습니다. 그저 현재 제가 할 수 있고,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폭력 생존자에서 피해자 조력 활동가가 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 어떠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특별한 계기는 없습니다. 무너진 언어체계의 회복,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안전하게 내 발화를 이어나갈 익명의 공간을 찾아 ‘트위터’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 제 이야기를 하다가 피해자들에게 사법시스템과 관련한 정보를 제공, 정보 제공만으로는 피해자 조력이 충분하지 않아 수사기관 및 법원에 신뢰관계인 등으로 출석, 이후 사법시스템 하에서의 싸움에 적합한 전략 수립, 문서 작성 등 직접연대를 하게 되었고, 피해자 대상의 직접연대 활동을 하다보니 시스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해 관련 매뉴얼, 체크리스트의 공유, 각종 세미나 및 강연 기획, 피해자와 연대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수사기관 및 법원, 아울러 언론 등에 대한 문제제기 등 간접연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일 뿐입니다.”

-미투 운동이 등장한 이후 활동하면서 체감한 변화가 있으신가요?

“‘미투 운동’이라 함은 2018년 초 서지현 검사의 피해 공론화를 말씀하시는 것일 텐데, 사실 그 전에 이미 많은 피해자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이용해 발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2018년 사회 각 분야로 확장되었으며, 특히 사법시스템을 이용한 문제해결을 좀더 적극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2018년이 피해자 발화(공론화를 포함)의 확장이었다고 한다면, 2019년은 그 발화에 대한 사회 각 분야의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시스템 변화를 위한 각종 방법들을 고민하던 시기였고, 2020년은 변화를 촉구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실제 정책 등에 반영되어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변화 촉구의 움직임이 기존 시스템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시기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실전 매뉴얼’을 공유하며 많은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계신데, 한편으로는 사회 시스템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개인들의 헌신에 기대는 느낌도 듭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며칠이 걸려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작년 12월에 만났던 현직 판사들에게서도 들은 얘기입니다만, 제가 하는 다수의 연대활동은 사실 사회 시스템이 맡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연대의 최종 지향 역시 개인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적절하게 작동해 피해자, 약자, 소수자가 시스템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지원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현재 있는 제도나 지침에 대해 교육 등을 통해 알리는 작업을 적극적이고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 기존 상담기관이나 센터가 피해자 지원을 충실히 해낼 수 있게 충분한 예산을 확보해 지원 인력 확충 및 시스템 정비를 제대로 할 것, 현재 수사 및 재판 단계에서의 지원에 집중되어 있는 피해자 지원의 범위를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 보다 폭넓게 지원체계를 만들고 실질적으로 지원할 것 등이 있습니다. (입법, 사법적 차원의 변화 부분은 이 답변에서 제외했습니다)”

-성폭력 재판에서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이는 성폭력 사건의 종류와 피해자 성향에 따라 너무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으므로 단언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재판을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피해자의 경우로 한정해서 말씀드리자면, 재판 진행에 있어 피해자가 소외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입증 책임이 있는 검사는 피해자와 소통하지 않고, 피해자 변호사는 재판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한정적인 데다가, 피고인에게 기울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는 형사재판의 특성상 피해자 목소리가 가서 닿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에서 ‘당사자’가 아닌 피해자의 지위, 그로 인한 정보의 불균형, 피해자 조력을 위한 인력의 미비 등이 결합되어 재판에 참여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피해자들이 많습니다. 재판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증인신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마저도 이미 피해자 보호를 위한 여러 지침과 제도가 있음에도 현장에서 적용되기 어려운 데다가, 신문과정 자체가 피해자 대상의 추가가해의 형태로 이어져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재판의 결과 역시 (언론 보도를 통해 나오듯) 피해자가 납득할 만한 형량이나 이유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범죄에 비해 성폭력은 피해자 입장이 지워진 채 재판이 진행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정작 피해자의 말이 닿기 어려운 구조가 현재의 형사재판입니다. 기본적으로 형사재판은 검사와 피고인이 당사자이고 피해자는 증인신문 등의 절차에서 자신의 말을 전달할 수 있는데, 물적 증거보다는 진술 신빙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일반적인 성폭력의 경우 그 증인신문 외에는 피해자가 발화할 기회가 실질적으로 없다시피 하며(물론 ‘피해자 의견진술권/재판 기록물에 대한 열람복사 신청’ 등 피해자의 재판 참여를 위한 각종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알고 재판에 임하는 피해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 하나 알려주는 이들이 없죠) 물적 증거 확보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에는 공소사실을 인정하며 읍소하는 피고인 측의 전략에 의해 피해자가 법정에 서지도 못한 상태가 되다보니 두 경우 모두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이입하거나 공감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재판 결과 역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나오는 경우가 다수입니다.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유죄, 피해자의 눈물이 유죄의 증거’ 따위의 말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그런 식으로 피해자에게 이입할 수 없는 현재의 형사 재판을 알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명백히 틀린 표현인 것이죠.”

-재판부의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은 여전히 계속 지적되고 있습니다. 어떠한 절차와 방법을 통해 개선해 갈 수 있을까요?

“우선 ‘성인지 감수성’은 사회 속에서 여러 요인에 의해 이미 기울어진 상태로 피해를 입는 이들을 고려해 관점의 균형을 잡고 사건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하려는 고도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런 ‘성인지 감수성’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기를 수 있는데, 현재 판사들 대상의 교육 프로그램이나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 문제에 대해 판사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가 전무하다는 데 있습니다. 현직 판사들을 만날 기회가 이어지고 있는데, 평가에는 방어적이고 예민하게 굴면서, 정작 개선의 의지나 절차적 보완을 위한 노력이 내부에서 너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성범죄 전담 재판부’라고 내세우고 있으나 정작 관련 사안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은 전무하다시피 하여 판사들 개개인의 성향에 맡겨진 게 현재 상태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야 판사들 내부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을 하고, 성범죄를 다루는 재판부(다른 범죄들에 비해 특히 ‘사람’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 구성 시 교육 결과 등을 적극 반영하며, 법관의 성비 불균형 문제도 고려해 배치, 나아가 문제 발생 시 내부에서의 징계 등을 하는 방향으로 가면 좋을 것이지만, 현 상태에서는 내부의 자성과 변화 움직임이 없지는 않으나 너무 소수라 솔직히 기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부 압박을 이어나가는 방법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법관에 대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도록 입법 활동을 하고, 일반인들이 ‘방청연대/재판 모니터링’ 등을 통해 재판 진행 및 결과에 대해 감시+기록+목격 활동을 이어나가며,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라는 판사들의 항변에 대응하기 위해 판결문 공개 범위를 넓히고 그에 대한 분석 및 비판을 이어나가는 등 여러 방법이 있을 겁니다.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외부에서라도 잡아 끌어 변화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재판부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도입하지 못하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흔히 제기됩니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도입을 입에 올리기에 앞서 아예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에 대해 이해를 ‘안’ 하려는 나태와 무지를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워 합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당 사례야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불법촬영 및 유포 등 디지털성범죄를 먼저 고소하고 강간 등 물리적 성폭력을 나중에 고소했다고 무고로 의심하는 등 디지털성범죄와 그 피해자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든지, 그 유명한 ‘감자탕집 사건’처럼 고기를 덜어주는 행위, 반지를 피고인 앞에서 뺐다 꼈다 하는 행위 등을 성관계에 대한 묵시적 동의의 형태로 여겨 무죄를 선고하는 등 피고인 입장에서만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라는지, 연속적인 성폭력 피해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상태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한다든지, 여전히 피해자의 성 경험 이력,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 사생활 등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데 활용한다든지 등. 너무 많아 열거조차 어렵습니다.”

-최근 성폭력 재판 관련 세미나, 방청연대 1박2일 프로그램 등 연대자들을 모으고 교육하는 활동을 활발히 하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현재 국가나 기관 등에서 해야 할 일을 개인인 제가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확히 알아야 비판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어나 정보 리터러시 능력을 기르는 데 실패한 한국의 현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시스템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적 비난만 하거나, 입법으로 넘기는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쉽고 빠른 선택지’만 내세우는 흐름이 강한데, 저는 그것이 매우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방청연대’ 역시 다수의 연대자가 법정을 지켜 피해자를 지지하는 의사표현을 하는 정도의 소극적 형태에서 나아가, 형사재판의 절차에 대한 교육을 바탕으로 판사, 공판검사, 피고인 모두를 지켜보며 재판에 대한 실질적인 감시, 기록, 목격을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교육을 받은 분들이 개인적으로 방청연대를 지속하신다든지, 소규모의 방청단을 꾸려 다른 이들에게도 교육 내용에 대해 전달하는 모습 등을 목격하고 있는데, 개인인 제가 했던 일을 이젠 일반인들이 할 수 있게 그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이고 주효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사 및 재판의 전 과정을 피해자의 입장과 시각에서 살펴보고, 각 단계별로 피해자에게 필요한 제도 등 정보 제공 및 전략 전달 등을 위한 세미나, 주제를 선정해 관련 재판 및 판결문에 대한 분석 세미나 등 수사 재판 전 과정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짚어나가는 프로그램들이다보니 호응도도 높고 효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 등 물리적 제약이 있는 상태라 한계가 있지만, 앞으로도 이런 기획은 안전을 전제로 다양하게 구성할 생각입니다.”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조언이 있다면 해주세요.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일단 살아요. 살아 있으면 당신을 위해서 뭐라도 할테니. 당신이 살아서 사법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 선택지를 골랐을 때 당신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덜 고통스럽게,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바탕으로 당신이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을 다시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피해자인 당신의 말, 시간,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살아요.”

정리=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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