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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사랑의 달고 쓰고 시고 매운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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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지음/위즈덤하우스·1만3800원



이기호(사진)의 신작 <누가 봐도 연애소설>은 ‘짧은 소설’ 모음이다. 원고지 20장 안팎 짧은 분량에 달고 쓰고 시고 매운 사랑의 여러 맛을 담았다. 대체로 무겁지 않고 가벼워서 읽는 동안 슬며시 웃음을 머금게도 되지만, 읽고 나면 잔잔하면서도 오랜 여운이 남는 이야기들이다.

‘내 인생의 영화’는 극장에서 뒷자리 관객의 카메라를 부순 죄로 경찰서에 불려온 남자가 형사에게 늘어놓는 하소연이다.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미옥이가 졸업하고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쫄딱 망하고 남편과도 별거 상태로 낙향한다. 트럭 운전으로 전국을 떠돌며 나이 쉰이 되도록 혼자인 그는 미옥이의 아픔을 다독이며(“사랑이 생기려면 상처를 봐야죠.”) 오랜 짝사랑의 결실을 꿈꾼다. 그가 미옥이와 처음으로 극장엘 갔는데, 뒷자리에 앉은 이가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는다. 영화를 촬영해서 인터넷에 팔려던 것인데, 그걸 모르는 미옥이 불안해하자 카메라를 치우라고 요구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벌어졌던 것. “저 인간이 오늘 훔친 건요, 그냥 영화가 아니고 제 인생의 영화였어요.”

호수 공원 산책길에 마주친 여자에게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있다. “한겨울 아침 문을 나섰을 때 비로소 보게 된 간밤의 눈처럼 맑고 깨끗”한 목소리에 반한 것인데, 여자는 그 목소리로 반려견 몽이를 부르고 있었다. 궁리하던 남자는 강아지 한 마리를 산다. 접종이 끝나기까지 한 달 동안 원룸에서 강아지를 먹이고 똥오줌을 누이며 뒤치다꺼리를 하던 남자는 마침내 강아지를 데리고 호수 공원으로 나간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여자와 마주친다. “어머, 얜 완전 아기네요. 아이고, 귀여워라.” 여자가 남자의 강아지에 관심을 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몽이가 사납게 짖으며 강아지를 위협한다. 남자의 반응은 그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조심하셔야 할 거 아니에요! 가뜩이나 어린애인데!”(‘사랑은 그렇게’)

사소한 일로 별거를 택한 노부모는 서로의 퇴행성관절염 약이며 귀리선식, 전립선 약을 아들 편에 챙겨 보내고(‘어떤 별거’), 맹랑한 초등생은 여자친구가 걸린 독감에 저도 걸리겠다며 쓰던 마스크를 챙겨 간다(‘독감’). 유학을 떠나는 여자친구를 배웅하러 공항에 간 청년(‘출국’)은 애틋한 마음과는 달리 하품을 연발하고(“슬픈데, 마음은 너무 아픈데, 왜 이다지도 피곤하고 졸린 것이더냐.”), 에스엔에스에서 호감을 느껴 만난 남자한테서는 참을 수 없는 입냄새가 난다(‘차마 전할 수 없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지만, 또한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것이기도 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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