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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한국 생활 60년 비결요? 눈치와 분수 알기 그리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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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펴낸 메리놀회 함제도 신부

미국 천주교 메리놀회(會) 함제도(미국명 제라드 해먼드·87) 신부가 사제 서품과 한국 생활 60년을 맞아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을 펴냈다. 작년 여름부터 9차례에 걸쳐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소장 강주석 신부) 연구팀과 인터뷰를 통해 구술(口述)한 내용을 엮었다.

1933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 후손으로 태어난 함 신부는 1960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한국으로 왔다. 그는 파견 당시 '1·2·3지망'을 모두 '한국'으로 적어냈다고 한다. 회고록에는 지금은 대다수 한국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어렵던 시절의 한국 풍경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못사는 나라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다. 같은 눈높이에서 느끼는 연민(compassion)이다. 29년 동안 청주교구에서 지내다 1989년 메리놀회 한국 지부장을 맡아 1995년부터 작년 3월까지 6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지원에 나선 태도 역시 다르지 않다. 함 신부는 "고통을 겪은 같은 민족이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함 신부는 "신부님은 진보냐 보수냐"는 질문에 "나는 가톨릭"이라고 답했다.

조선일보

함제도 신부가 60년 전 사제서품 후 받은 십자가 목걸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함 신부는 “한국 생활 60년을 항상 함께한 십자가”라며 “이 십자가는 제가 죽은 후 관에 함께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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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선종(善終)한 장익 주교님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습니다.

"1951년 펜실베이니아의 메리놀 소신학교(고교 과정)에서 만났습니다. 제 옆자리에 앉게 돼 '짝꿍'으로 친해졌죠. 장 주교는 저에게 항상 '사제가 되면 한국으로 오라'고 했지요. 마지막 만났을 땐 제가 장 주교님에게 '형님'이라 불러보라 시키고 저는 '오냐~'하고 농담하며 서로 웃었지요. 장례 미사 때 많이 울었습니다."

―장호원성당에서 아이들과 놀고 난 후 '로맨스'를 시작하셨다면서요?

"어느 날 지부장 신부님이 저를 운전시켜서 장호원성당에 갔어요. 신부님은 일 보시고 저는 마당에서 아이들과 놀았어요. 서양 사람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온 아이들에게 '눈을 먹을까? 코를 먹을까? 입도 먹을까? 왁!'하고 놀라게 하면서 재밌게 놀았죠. 돌아오는 길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 '신부님은 비로소 로맨스를 시작한 겁니다'라고 하시더군요."

함 신부는 1960년부터 1989년까지 청주교구 북문로성당, 수동성당, 괴산성당의 주임신부를 지냈다. 가난했던 당시, 함 신부가 자전거 한 대를 사려고 해도 파르디 주교는 거부했다. "왜 한국 사람들보다 편하게 살려 하느냐"는 이유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미국 메리놀 본부에서 보내주는 달러를 서울 명동 암달러상에게 바꾸면서 생긴 차액으로 장학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청주교구에서 보낸 29년이 매우 행복했다고 회고했습니다.

"한국어가 잘 안 되니 열심히 다녔어요. 5일장이나 장례식장 등 사람 모이는 곳을 찾아다녔어요. 신자들 가정도 다 방문하고요. 수동성당을 지을 때엔 제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땅 사서 지었어요. 어머니 회갑 잔치도 청주에서 열었죠. 제가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인데 한국 와서 더 급해졌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이 청주교구에서 30년 보낸 거죠. 다들 '천천히 하는겨~'라고 하시니까요(웃음). 괴산성당 있을 때 안구 기증했고요, 지금 제 무덤 자리는 청주교구에 있어요. 두 자리를 부탁했어요. 제가 뚱뚱해서 2인분이 필요해서요, 하하."

―외국인 선교사로 한국 생활 60년의 비결을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눈치'와 '분수(알기)' 그리고 '함께'입니다. 최대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함 신부는 1990년 이후 개신교계 유진벨재단과 협력해 북한의 결핵 환자 지원 사업을 돕고 있다. '왜 개신교를 돕냐' '왜 공산주의자를 돕냐'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회고록 독자들에게 '관심'을 당부했습니다.

"무서운 것이 무관심입니다. 1960년 처음 한국에서 받은 인상은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북한이 그렇습니다. 1960년 당시 선배 선교사들은 '우리가 여유 있어서 나눠준다고 하면 안 된다. 항상 상대를 존엄과 존중으로 대하라'고 했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에선 '(사제들이) 미사에서 만나길 기다리지 말고 더 많이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면서 적극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성당에서 기다리고 있어선 안 됩니다. '함께'가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함 신부는 "다음엔 치맥 한턱 내겠다"고 했다. "왜 한턱 내는지 아세요? 제가 두 턱이잖아요?"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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