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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유년의 원림(園林)과 현대 건축을 조화시킨 아이엠 페이(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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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효아키텍트-49]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밍페이(Ieoh Ming Pei, 貝聿銘, 베이위밍)가 2019년 5월 10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뉴욕타임스는 한 페이지를 할애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렸다. 페이는 아이엠페이(I. M. Pei)로 잘 알려져 있다.

페이는 1917년 중국 광저우의 은행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곧 그의 가족은 상하이 인근 일명 '정원의 도시' 쑤저우로 이주했다. 페이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 18세에 미국으로 이주해 1940년 매사추세츠공과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1946년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발터 그로피우스의 지도로 건축학 석사를 취득했다.

1948년부터 7년간 뉴욕 부동산 개발업자 윌리엄 제켄도프가 설립한 회사 웹앤납(Webb and Knapp)을 다녔다. 그는 대규모 건축 설계와 도시계획을 담당하면서 실무를 익혔다. 미국 의회는 전후 주택난을 타개하고자 1949년 법안 '타이틀 원'을 통과시켰다. 도심의 슬럼 지구를 헐고 새로운 고층 주거시설로 재개발하는 환경 개선 법안이었다.

페이는 구조와 외피가 하나 되는 방식의 콘크리트를 개발했으나 평당 공사비가 650달러나 됐다. 제켄도프는 고속도로와 다리를 짓는 콘크리트 회사를 페이에게 맡겼다. 페이는 평당 단가를 365달러로 낮출 수 있었다.

페이가 개발한 콘크리트 건축의 특징은 모서리 디테일이다. 고층 콘크리트 건물은 재료 때문에 무거워 보인다. 측면은 45도 접어서 안으로 집어넣고, 전면은 갈라서 측면 위에 포개면 모서리에서 빛이 나고 전면과 측면은 미끄러지면서 건물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페이는 창문 앞에 두꺼운 콘크리트 루버(채광이나 통풍을 위한 비늘창)를 두었다.

1955년 아이엠페이 앤드 파트너스(I. M. Pei & Partners)를 설립했다. 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1961),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Place Ville Marie(PVM, 1962), 대만 퉁하이(東海)대 루스 예배당(1963)을 설계했다.

페이는 케네디가와 두 번에 걸친 인연을 갖는다. 두 번 다 케네디가 죽고 난 뒤이고 페이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1917~1963) 사후 미망인 재클린은 건축가 여러 명을 만났다. 그중에는 미스 반데어로에와 루이스 칸도 포함됐다. 페이는 재클린이 사무실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리셉션 공간을 새로 페인트칠 했다. 테이블 위에는 신선한 꽃다발을 뒀다. 재클린이 "리셉션에 늘 신선한 꽃을 두세요?"라고 물었고 페이는 "당신을 위해 오늘만 두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어떤 도서관을 염두에 두느냐"는 재클린의 물음에, "아직은 (당신과 대화가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페이가 케네디와 같은 출생연도(1917)라는 것도 선정된 이유였다. 페이는 1965년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개발업자의 설계사'에서 '미국 최고 아키텍트'로 부상했다.

디자인은 삼각형의 메스와 사각형 유리 박스가 결합한 형태이다. 아트리움은 글라스 커튼월로 되어 보스턴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탁월한 조망을 확보했다.

매일경제

보스턴 JFK대통령 도서관(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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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는 JFK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1979) 설계 후 워싱턴 국립미술관을 수주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이 미술관을 보고 페이에게 루브르 박물관을 맡겼다.

댈러스는 케네디가 암살당한 불행한 도시인 반면 페이의 작품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1964년 케네디 암살로 인한 댈러스시의 부정적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시장은 시청사를 새로 건립하고, 커뮤니티 재생 사업을 시도했다. 시장은 신축 시청사가 상징성을 갖도록 해달라고 페이에게 요청했다.

댈러스 중심지에서 영 스트리트(Young Street)를 따라 걷다 보면 캔틸레버(외팔보)로 지탱하는 육중한 건물이 122피트 높이에 560피트 길이의 시청이다. 시각적으로 쓰러질 것같이 압도하는 느낌과 강한 에너지를 풍기는 카리스마 있는 역동성이 시청사 건물로 상징된다.

페이는 시청사 신축을 위해 주변 환경에 조화시키고자 고심했다. 다운타운 업무지구의 고층건물 스카이라인 형태와 시청사를 대응시키는 방향을 정했다. 페이는 건물의 저층부보다 상층부에 설계의 초점을 두었다. 건물 전면은 34도 정도 기울어지게 설계했다. 건물이 앞으로 쓰러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건물 앞으로 광장이 펼쳐지듯이 배치되고, 지지 기둥이 건물을 들어올리도록 했다. 이 방식은 르 코르뷔지에가 인도 '샨디가르(Chandigar)' 대법원 건물을 설계한 방식을 차용했다.

공사비가 당초 예산을 뛰어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착수 11년 후인 1978년 완공됐다. 신청사 완공 후 페이는 높은 지지 여론을 바탕으로 댈러스에 '오페라하우스', 중심부 상업지구에 뾰족한 모서리가 찌를 듯이 하늘을 향하는 오각형 암청색의 유리를 사용한 '파운틴 플레이스(Fountain Place)' 건물을 설계했다.

매일경제

보스턴 존 핸콕타워(John Hancock Tower. 1968~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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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존 핸콕 타워(John Hancock Tower, 1968~1976)는 JFK도서관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됐다. 페이의 파트너인 헨리 코브(Henry Cobb)가 관여했다.

인근의 트리니티 교회는 보스턴 출신의 건축가 헨리 리처드슨이 '유럽식' 건축과 '뉴잉글랜드식' 건축을 혼합해 리처드슨 로마네스크(Richardson Romanesque)라는 새로운 미국식 건축양식을 적용한 첫 사례로 평가받는다.

트리니티 교회는 보스턴 대표 광장인 카플리 스퀘어에 있다. 프루덴셜 타워는 카플리 서쪽에 정사각형 52층 타워로 보스턴에서 가장 높이 지어졌다. 타워는 '최대 면적, 최대 수익 확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워진 박스형이었다. 이는 역사와 예술과 지식으로 자부심이 가득한 보스토니언(보스턴 사람)에게 외지 기업인 장사꾼 뉴요커(뉴욕 사람)가 가하는 선전포고였다.

프루덴셜의 경쟁사이자, 보스턴 토박이 보험사인 존 핸콕이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다. 핸콕은 반격을 기획했다. 핸콕이 선정한 대지는 트리니티 교회 옆이었다. 보스턴 건축계는 반대했다. 시는 전문가 자문단 의견에 흔들렸다. 건축주인 핸콕은 시공을 허가해주지 않으면, 1만2000명의 직원을 데리고 본부를 시카고로 이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보스턴시는 핸콕의 손을 들어줬다.

보스턴 출신의 카브는 트리니티 교회의 상징성을 위해 자신을 최대한 낮췄다. 정사각형 대신 평행사변형 타워는 트리니티가 드러나게 되고, 핸콕은 물러난다. 평행사변형 탓에 핸콕타워의 코너는 예각으로 접혀 코너가 얇아 보인다. 타워의 좁은 면에 홈을 파서 검은색 스테인리스 스틸을 부착해 타워의 날카로움을 더 돋보이게 한다.

[프리랜서 효효]

※참고자료=건축가 이중원 칼럼, 박영우 건축가 블로그, 임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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